보이스피싱 수거책 역할

지시 따라 아파트 현관문 앞 4000만원 가져가

법원, “사기 아니다…피해자 처분의사 없어”

대법원. [연합]
대법원. [연합]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보이스피싱 수거책이 피해자가 아파트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둔 현금 4000만원을 가져갔더라도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노경필)는 사기 혐의를 받은 A(53)씨에 대해 이같이 판시했다. 대법원은 A씨의 일부 범행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2심) 판결이 정당하다며 확정했다.

A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수거책을 맡은 혐의를 받았다. 조직원들은 우선 피해자들을 속여 아파트 현관 앞 등 특정 장소에 현금 수천만원을 인출해 놔두게 했다. 이어 A씨는 조직원들의 지시에 따라 현금을 가져온 뒤 일부를 자신의 일당으로 챙긴 다음 ATM을 통해 일당에게 지급했다.

A씨의 범행은 2021년 11월께 총 3차례 이뤄졌다. 피해 금액은 총 8000만원이었다. 현금 수거에 따른 일당으로 A씨는 한 건당 20만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A씨 측은 “건설업체에 채용돼 업무를 하는 줄 알았다”며 “회사가 대출을 실시해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인식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면접을 보는 등 제대로 된 채용 절차도 거치지 않았고, 회사 명의도 비정상적이었으며, 이례적인 업무 행태란 점 등이 고려됐다.

1심을 맡은 창원지법 형사6단독 차동경 판사는 2022년 11월 A씨의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징역 10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보이스피싱 범행에 가담해 죄질이 좋지 않다”며 “여러 명의 피해자들을 상대로 반복 범행했을 뿐 아니라 피해금 합계가 8000만원을 초과할 정도로 피해 규모가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했고, 피해 회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범행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진 않았다”며 “확정적 고의로 범행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는 점, 전체 피해 금액에 비해 피고인(A씨)이 취득한 이익이 매우 적은 편인 점, 자수한 점 등을 유리하게 고려한다”고 했다.

2심에선 감형이 이뤄졌다. 범행 일부에 대해 사기 무죄가 나온 결과였다. 2심을 맡은 창원지법 제1형사부(부장 이주연)는 지난해 7월, A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A씨의 범행 중 일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본인의 아파트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둔 4000만원을 가져온 것과 관련해 사기 혐의가 적용된 건이었다.

2심 재판부는 무죄를 택한 이유에 대해 “사기죄의 구성요건인 재산 처분의사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처분의사란 사기죄에서 피해자가 재산상 손해를 초래하는 처분행위를 할 인식을 의미한다.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속임수로 인해 착오에 빠져 처분행위를 해야 한다.

이는 사기죄가 절도죄와 구별되는 차이점이다. 예를들어 도둑이 보석상에 들어가 ‘목걸이를 살테니 보여달라’고 하여 목걸이를 건네받은 뒤 도주했다면 이때 역시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목걸이(재산권)에 대한 처분의사 또는 처분행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현금 4000만원을 현관문 손잡이에 걸어뒀다고 하더라도 이를 완전히 건네준 게 아니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었던 점, 누군가 가져갈 것이라 생각하진 못한 점 등을 고려했을 때 A씨에게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피해자의 재산권 처분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법원도 “2심 판결에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며 일부 범행의 사기 혐의에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만약 재판 과정에서 검찰 측이 A씨의 혐의에 예비적 공소사실로 절도 혐의를 추가했다면 유죄가 선고될 수 있었다. 예비적 공소사실이란 선순위의 혐의(사기)가 인정되지 않으면 후순위의 혐의(절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해달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검찰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판단을 받아볼 기회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