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도는 몇 단계?
‘우리는 하나’ 미명하에 폭탄주에 과음 강요 술 마시는 속도도 LTE급
술소비·종류 늘었지만 ‘주도유단’ 풍류는 옛말
주흥이 오르면 나이 지긋한 식자들은 고금의 휘황한 문장 몇 구절에 기대어 묻어뒀던 호연지기를 드러내곤 한다. 그 중에서도 조지훈 시인의 ‘주도유단(酒道有段)’은 연말 술자리에서 회자(膾炙)되는 문장들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산문이다. 술의 참된 경지를 배우는 학주(學酒), 술의 취미를 맛보는 애주(愛酒), 참된 경지를 체득한 탐주(耽酒), 주도를 수련하는 폭주(暴酒), 주선(酒仙)에 든 장주(長酒), 술을 너무 사랑해 아끼는 지경에 이르는 석주(惜酒), 술이 있으나 없으나 유유자적하는 낙주(樂酒),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마실 순 없는 관주(觀酒), 술로 인해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되는 폐주(廢酒)까지…. 조 시인이 정의한 주도 18단계 중 자신은 몇 단에 속하나 가리는 일은 그 자체로 맛난 안줏거리이니 말이다.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주정(酒精)의 함량에 비례한다. 서양에선 위스키 등 증류주를 스피릿(Spirit)이라 일컫는다. 주정의 ‘정(精)’과 스피릿은 모두 정신을 의미한다. 동서양 모두 술을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정신문화의 일부로 인식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술은 풍류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부터 이태백이 놀던 달, 고흐의 귀를 자르게 만든 독주인 ‘초록색 요정’ 압생트(Absinthe)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술에 빚지지 않은 예술가는 드물다. 풍류가 있는 사회는 거칠고 삭막하지 않지 않다. ‘주도유단’이 세상에 나온 1956년은 전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이었다. 궁핍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이 같은 익살이 가능했음을 바라보며 한국인의 풍류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심지어 1800년 전의 중국의 기록인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도 부여의 제천행사인 영고(迎鼓)에 대해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춘다(連日飮食歌舞)”고 기록하고 있으니 말을 다했다.
문제는 술 소비량만큼 지금 한국에 풍류가 넘치느냐다. 영국 국제주류시장연구소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전 세계에서 17년산 이상 고급 위스키를 가장 많이 소비한 나라다. 그것도 2001년부터 무려 11년째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 국제주류시장연구소는 지난 13일 고급 위스키 한국 출고량이 69만8000상자(한 상자 9ℓ 기준)라고 밝혔다.
2위는 47만8000상자를 출고한 미국, 3위는 23만4000상자를 출고한 중국이다. 인구 5000만명의 나라 한국이 3억명의 미국, 13억명의 중국보다도 더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시는 속도도 LTE급이다.
그것도 얌전히 마시지 못하고 주종을 뒤섞어 내놓아야 성이 풀린다. 주량과 상관없이 서로가 감당 못할 권주가(勸酒歌)를 부르며 자의 반 타의 반 강요된 폭음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우리는 하나’란 표현으로 미화한다. 술이 모자라 풍류가 모자란 게 아니다. 주정(酒精)이 과하면 주정(酒酊)이 되는 것을. 남는 것은 끔찍한 뒤끝이다.
또다시 연말이다. 연초엔 다가올 연말이 믿기지 않았는데, 연말이어도 연말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연말이면 사람들은 대개 다가올 새해에 대한 기대보다 지나간 한 해에 대한 앙금이 깊어 쩔쩔맨다. 덕분에 송년회란 이름을 빌려 이 핑계 저 핑계로 열리는 술자리도 많다. 연말은 술 한 잔 얻어먹기도 술자리에 껴서 놀기도 가장 좋은 때다. 연말 술자리만큼 자리를 내주는데 너그러운 술자리도 드물다. 다시금 ‘주도유단’이 회자될 계절이다.
조 시인은 주도의 단계를 나눔에 앞서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 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이제 ‘주도유단’은 주격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주량을 알고 절제하란 뼈있는 충고로 들린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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