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비좁은 명동(明洞)이지만 명실공히 아시아 대표 관광·상업특구 근대화 시작되면서 금융·문화·예술의 꽃피우고…패션중심지로 명성 80년대 강남으로 소비의 축 이동…외환위기 맞아 거의 잊혀진 명소로 2002월드컵 기점으로 관광객 급증…뉴욕 타임스스퀘어, 베이징 톈안먼 광장과 같은 스토리가 있는 명동, 세계적인 ‘잇 플레이스’로 화려하게 재탄생
퇴계로와 을지로 소공로로 둘러싸인 0.44㎢의 다소 비좁은 공간 명동(明洞). 대한민국 1번지 명동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하루에도 100만명 이상 유동인구가 오가고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외국인이다. 명실 공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관광ㆍ상업 특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명동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상업지구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남촌에 속해 있던 명동은 당시 지명이 ‘명례동(明禮洞)’ 혹은 ‘명례방’으로 불렸다. 이후 일제시대에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리다가 1946년 ‘밝은 고을’이란 뜻의 ‘명동’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이름 때문인지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1956년부터 1979년까지 지금은 여의도로 옮겨간 증권거래소가 명동 한복판에 있었고 시중은행 본점들 역시 명동에 집중돼 있었다. 자연스럽게 산업화 이후 국내 최대 블랙마켓 즉, 사채시장이 형성돼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경제만이 아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근대 문물의 집산지였던 명동은 해방 이후 50~60년대 문화예술계의 중심이었다. 특히 시인들 가운데는 명동미남으로 통하던 김수영, ‘명동백작’ 이봉구, ‘청동다방’을 집무실처럼 여기던 오상순이 명동의 낭만을 글귀로 담아냈다.
1981년 해외여행 자유화 전까지 명동은 지금의 청담동이나 강남역, 홍대앞을 훨씬 능가하는 패션의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고급 맞춤양복ㆍ양장점의 집산지였다.
그러나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하고 새로운 부촌으로 부상한 강남을 중심으로 백화점 소비 패턴이 자리 잡으면서 80년대 중반 이후 명동은 주춤해졌다. 특히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명동 상권은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2000년대로 접어들어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한국인이 빠져나간 명동에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오면서 부활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기점으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명동을 쇼핑의 메카로 여겨 불을 지피더니, 2000년대 후반에는 중국인들이 명동에 쌈짓돈을 쏟아냈다. 2010년 이후에는 미주ㆍ유럽 관광객들까지 몰려들어 명실 공히 아시아의 맨해튼이 됐다.
현재 명동에서 소위 잘나가는 장사는 호텔업과 화장품, 마사지업 3가지로 압축된다.
호텔업의 경우 넘쳐나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기존 사보이ㆍ메트로ㆍ로얄ㆍ세종호텔에 이어 조선호텔도 저가 비즈니스호텔 분야에 도전장을 냈다. 스카이파크호텔 등 중ㆍ저가 브랜드도 70년대 이후 긴 침체기를 보낸 명동1가 을지로입구 지하철역 외환은행 본점 인근까지 지점을 늘리고 있다.
화장품은 중국ㆍ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면서 큰돈을 벌자 브랜드마다 명동에만 5개 점포를 내기도 하는 등 과열 현상까지 나타난다.
처치 곤란이던 노후건물 고층부에는 일본인 관광객 전용 마사지숍이 들어서 100곳을 넘어섰다. 최근 명동에 가게를 낸 의류사업가는 “외국인 대상 장사가 일평균 매출의 80%가량을 차지하고 중간중간 덤으로 내국인 장사를 하는 수준”이라며 “가끔 한국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정도”라고 말했다. 뉴욕의 타임스스퀘어, 베이징의 톈안먼광장같이 한국을 대표하는 ‘잇플레이스’로 화려하게 재탄생한 명동의 현주소다.
<윤정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