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인도 델리 ‘간디 스므리티’·아흐메다바드‘아슈람’
마지막 144일 보낸 스므리티선 옷감 직접짜며 무소유정신 계승 자기개혁 실천 공동체 아슈람은 소외어린이 돕기 자원봉사 활발 간디정신 잇기 지속적인 활동
[델리(인도)=이해준]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인물이었다. 한국을 출발할 때부터 간디의 일생을 소개한 작은 책자를 갖고 와 가족들이 여행 도중에 돌려가면서 읽기도 했다. 인도를 여행하면서 간디를 만나고 싶은 생각은 더 커졌다. 그가 위대한 인물이기도 했지만, 인도에서 가장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디는 ‘인도의 국부’로,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든 인도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인도 곳곳에서 그의 정신을 기리는 기념물이나 그의 이름을 딴 도로, 지명도 무수히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관심을 갖고 방문한 곳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델리에 있는 간디 스므리티(Gandhi Smriti)로, 그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활동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유명한 ‘소금행진(Salt March)’을 시작한 구자라트 주의 아흐메다바드에 있는 ‘아슈람(Ashram)’이었다.
먼저 델리의 스므리티에 들어서자 그가 1948년 한 광신적 힌두교도에 의해 저격되기 전까지 마지막 144일을 보냈던 집이 기념관으로 바뀌어 관람객들을 맞고 있었다. 자유와 독립을 위한 인도인들의 투쟁 과정을 담은 다양한 전시도 이뤄지고 있었다. 간디 스므리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인도가 영국 식민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국가를 만들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인 1869년 구자라트 주의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소왕국의 총리를 지낸 유복한 집안으로, 젊은 시절엔 힌두교의 율법을 어기는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세 때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했는데, 당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넘기는 등 ‘멋진 영국신사’처럼 행세하기도 했다.
1891년 드디어 변호사가 되어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공 연방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지만, 인도인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것을 체험하면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신이 ‘인도인’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1910년대 중반 인도로 돌아온 후 인도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소송과 대중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인도의 대변자로 부상했다.
끝없는 체포와 투옥의 와중에서도 간디는 비폭력과 평화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원칙을 독립 투쟁은 물론 일상의 실천적 행위들로 연결시킨 것이다. ‘영국화된 인도인’의 상징인 양복을 벗어버리고 인도 전통의 흰 면옷으로 갈아입었고, 단순한 생활과 절제, 금욕, 자급자족 등을 실천해 나갔다. 자기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아슈람을 만들어 공동생활을 했다.
스므리티에는 그가 마지막으로 머문 집을 당시 모습 그대로 복원해 놓고 있었다. 방안에는 그가 이용하던 침구가 놓여 있었는데, 가구라고 해봐야 작은 앉은뱅이책상 하나와 필기구, 그리고 물레가 전부였다. 무소유와 소박한 삶의 표상이었다.
여러 도시들을 거쳐 방문한 아흐메다바드의 아슈람도 소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저 소박함에서, 잠자던 인도를 일깨우고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을 뒤흔든 ‘힘’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깡마른 몸에 무명천 한 조각만 걸치고 지팡이를 짚은 그 노인의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적 삶에 대한 염원과 진실의 힘이었던 것이다.
간디의 모습은 델리로 오기 전에 콜카타에서 보았던 마더 테레사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졌다. 마더 테레사 역시 외모로 보면 영락없이 가냘프고 힘없고 소박한 한 수녀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가진 순수함과 인간에 대한 사랑, 진실에 대한 헌신이 전 세계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 아닌가. 간디나 테레사나 모두 순수하고 진실된 인간 영혼의 위대한 승리자였던 셈이다.
스므리티의 방을 나오면 간디가 저격되기 직전 지지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기 위해 걸어갔던 길에 발자국을 새겨 놓았다. 그것을 따라 걸어가니 마치 조금 전에 간디가 저쪽으로 평화와 진실, 화해를 위한 기도를 하러 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시 인도는 영국 의회의 독립 승인에도 불구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갈등으로 독립정부를 출범시키지 못하며 심한 진통을 앓고 있었다. 끝까지 화해와 통합을 주장했던 간디의 갑작스런 저격 소식에 인도인은 모두 깊은 슬픔에 잠겼지만, 그가 염원하던 통합을 이루어내진 못했다. 인도는 결국 이슬람 진영이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운명을 맞았다.
간디가 대중들과 함께 마지막 기도를 하던 연단에는 “나는 빛이 어둠을 몰아내기를 기원합니다. 비폭력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와 함께 기도를 하기를 바랍니다”라는 글귀가 세워져 있었다. 간디가 앉았던 자리에 누군가 갖다 놓은 작은 들꽃 한 송이가 애잔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필자 가족은 신발을 벗고 그 유적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간디 스므리티에서는 인도와 간디의 독립 투쟁과정을 상세히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여기서는 ‘세포이의 반란’으로 알려진 인도 전역의 봉기를 ‘1857년의 대항쟁(Great Uprising of 1857)’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이 투쟁으로 “인도 국민들이 심각하게 차별받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났으며, 이것이 국민적인 독립 투쟁의 도화선이 됐다”는 것이었다.
이를 영국의 식민사가들이 ‘세포이의 반란(Sepoy Mutiny)’이라고 명명한 것은 의도적인 평가절하라며, 이 대항쟁이야 말로 인도의 첫 독립전쟁이었다고 해석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 한국의 역사학계가 ‘동학란’ 또는 ‘갑오정변’이라고 불렸던 1894년의 전국적 봉기를 반봉건-반식민을 기치로 내건 ‘갑오농민전쟁’이라고 새롭게 명명했던 것을 보는 듯했다.
바라나시에서부터 콜카타~델리~아그라~조드푸르~자이푸르 등 인도 북부의 거의 전 지역을 종횡무진 여행하며 많은 유적을 보면서도 영국의 그늘이 여전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는데, 여기에서 비로소 ‘살아있는 인도의 정신’을 보는 것 같았다.
간디 스므리티와 아슈람에서는 간디의 정신과 이상을 계승하기 위한 현지인들의 활동도 펼쳐지고 있었다. 스므리티에서는 직접 옷감을 짜서 옷을 만들고 있었고, 아슈람에서는 공동체 복원과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한 자원봉사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간디나 테레사가 감동을 주는 것은 현실에 대한 탄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이상을 실천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간디가 실천한 단순하고 절제된 생활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광포한 물결이 환경재앙을 불러오고 있는 오늘날 ‘지속가능한 삶’의 형태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간디의 비폭력과 평화의 사상 역시 약육강식의 경쟁논리가 압도하는 오늘날 미래지향적 가치이자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발자취를 좇아가면서 필자 가족의 마음에 간디가 살아나고 있었다.
자유기고가/hjlee@herald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