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난 성관계를 원치 않아요(Je n`ai pas envie, cheri(e). )

밸런타인데이를 전후해 에로티즘 전문 출판사 라 뮈자르딘은 ‘노 섹스’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책 속에서 페기 사스트르(Peggy Sastre)는 ‘아벤(AVEN)’의 시각을 옹호한다. ‘아벤’은 성관계를 원치 않는 섹스리스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단체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 어떤 성적 욕구나 리비도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섹스나 자위를 하고픈 생각이 그들에게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 수십 년 사이 섹스리스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시킬 필요 없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회 속 위상을 찾아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건너온 섹스리스란 호칭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사회에서 경멸받고 동시에 억압받고 있다고 확신하며, 또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식을 인정받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선의를 가진 자들일까? ‘노 섹스’란 저서 속에서 섹스리스들을 옹호하는 페기 사스트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모’의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평가되지 않았습니다. 그와 정반대였지요. 반면 육체적 관계를 맺거나 자위행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규탄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성혁명이 일부 실패를 거두었다 할지라도 한 가지 점에 대해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혁명 이후 허약한 리비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리비도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의 대상이 돼버렸습니다. 섹스에 대한 흥미가 거의 없다는 건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인식된 겁니다.”

섹스리스들이 이해심 깊은 친구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이들이 커플로 살기를 원할 때 직면하는 커다란 어려움은 플라톤적 사랑을 나누는 관계를 받아들이는 그 누군가를 찾아내는 일이다.

섹스리스 남성이 많은 여자 친구를 갖기는 어려운 게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섹스리스들이 자신들의 성생활 부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평가절하당한다고 느끼는 것도 확실하다. ‘문제’가 없는지 사람들이 항상 그들에게 물어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섹스리스들은 결코 환자가 아니라는 것이 페기 사스트르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노 섹스’ 속에서 그녀는 ‘아메바’로 살아가는 남녀들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다. 그녀는 ‘아벤’ 운동이 당연하다고 느낀다. 섹스리스들이 더 이상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녀는 “내 생각으로는 바로 거기에 기초해 공동체적 요구가 이루어집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 이야기할 거리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행동거지와 무취미를 정당화시켜야 한다는 일이 정말 짜증나지요”라고 이야기한다. 좋다.

섹스리스들이 설명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자. 여장 남자, 사도마조히스트, 호모들과 같은 방식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든 성소수자는 설명을 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동일한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이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일까?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 건강하지 않을까?

그 어떤 성행위도 순진무구하지 않다. 자신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면 우리들의 성적 환상 근저에는 항상 진창과 금기가 뒤범벅돼 있다. 이런 관점에서 섹슈얼리티는 썩어가는 꽃병에서 꽃을 피우는 연꽃과 흡사하다. 그것은 납을 금으로 변모시키는 기계이자 우리들의 수치심과 상처를 연료로 하는 놀라운 동력기이다.

사도마조히즘 행위는 열등감과 우월감과 관련된 어떤 모호한 콤플렉스를 숨기고 있을까? 동성애 속에는 어떤 공포와 고뇌가 감춰져 있을까? 포식행위에 아주 닮아있는 이성애 충동에 대해서는 또 뭐라고 이야기할 건가? 성과 관련된 모든 행위는 마법의 작전, 악령 추방 행위이자 치유의 의식이다.

위선자만이 어둠 속의 이 이상한 퍼포먼스에 연결된 폭력을 부정할 수 있다. ‘금욕에 대한 취향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하게 하거나 숭고하게 만들어주는가?’라는 내밀한 질문에 대해 섹스리스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내가 보기에 ‘아벤’ 운동을 불신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앙심을 품은 섹스리스들의 담론 속에는 모순적인 그 무엇이 느껴진다. “우리는 욕망 없이 그렇게 태어났다. 우리는 이성애자, 호모, 양성애자, 트랜스들과 같은 위상을 요구한다”라는 그들의 주장은 때로 성적 좌절감을 느끼는 발언들과 뒤섞인다.

우리 시선을 벗은 몸에 과도하게 노출시키는 광고들에 대해 한을 품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성에 대해 덜 이야기하기를 섹스리스들은 원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쾌락의 독재’라 부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우리는 진정 쾌락의 독재 속에서 살아갈까? 민주국가에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사랑을 나누도록 강요하는 그 어떤 법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무수한 법률들이 서로 합의한 성인들끼리의 일부 성행위들을 범죄로 단죄한다. 그룹 섹스는 미국의 일부 주에서 금지되고 있다.

사도마조히즘은 영국에서 심각한 법적 분쟁을 낳을 수 있다. 그곳은 최근까지 그룹 섹스가 금지돼 있다. 물, 오줌을 보거나 접촉하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모습은 스위스의 에로 잡지나 갤러리에서 금지된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는 창녀를 찾으면 투옥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서로 동의하는 성인들 간의 일부 성행위가 경범죄처럼 처벌을 받는다. 성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활발하다. ‘아벤’의 주장은 이러한 투쟁과 반대로 가고 있다.

‘노 섹스’에서 페기 사스트르는 쾌락에 ‘노’라고 이야기하는 자유를 포함한 모든 자유가 옹호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해 섹스리스들의 주장을 지지한다. “사랑을 의무적으로 나눌 필요가 있는가?”라고 그녀는 반문한다. 당연히 그럴 필요는 없다. 인생을 통틀어 우리가 성적 욕구를 느끼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섹스리스들은 리비도의 부재를 이용해 삶의 우연 이상으로 삼는다.

최종적인 사실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그 어떤 명분에도 섹스리스를 문제 삼지 말 것. 나는 욕망 없이 태어난 ‘진짜’ 섹스리스들이 그렇게 많은지 의심한다. 섹스리스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증언은 그들의 성욕 감퇴가 순전히 상황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보여준다.

대부분은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는 강박관념, 부부관계의 어려움, 무기력한 감정, 거부 등의 이유 때문에 기피한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섹스리스 운동 속에 피신해 있다. “나는 그런 식이니 귀찮게 만들지 말라.”

페기 사스트르의 ‘노 섹스. 사랑을 나누지 않기를 원하기(No sex. Avoir envie de ne pas faire l’amour)’는 라 뮈자르딘(La Musardine) 출판사가 출간했다.

(이미지는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중 노 러브 노 섹스의 주인공 캐리) 글=아녜스 지아르(佛칼럼니스트), 번역=이상빈(문학박사ㆍ불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