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식품서 연타석 홈런 날리고 세라젬의료기서 경영능력 입증… ‘얼쑤’로 또 한 번 건강음료에 도전장 내민 조운호의 삶
가정형편 어려워 상고 진학했지만 3년 내내 코피 쏟을 때까지 공부했어…담배 배울때도 죽자고 덤볐지, 내가 생각해도 지독한 근성이야
은행 생활 9년 미련없이 접고 ‘전투부대’ 웅진그룹으로 갔어… “부실계열 웅진식품 구하라” 특명에 또 한 번 승부사 기질 발휘했지
가을대추·아침햇살·초록매실 ‘산고’ 끝에 내놓은 제품 모두 빅히트쳤는데…부회장 발령에 세계일주 후 쿨하게 사표 던졌지
결국엔 직접 회사 차린게 벌써 4년이야…하루하루가 녹록지 않지만 전인류에 사랑받는 음료 난 만들거라니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더니, 그에게 솔잎은 ‘음료’였나 보다. 웅진식품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리고 세라젬의료기 등으로 발길을 돌렸던 조운호 (주)얼쑤 대표가 건강음료 사업에서 진가를 입증하고 있다. ‘아침햇살’ ‘초록매실’ 등 병입음료에서 선식 등 분말음료로 품목은 달라졌다. 하지만 소비자 요구에 맞는 ‘한 방’을 터뜨린다는 그만의 법칙은 여전했다. ‘자연두유’ ‘S다이어트’ 등 대표 제품은 몸에 좋은 건강음료라는 콘셉트를 갖고 있다. 요즘 어느 음료에나 ‘건강’이란 말이 안 들어가는 데가 없다. 일견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일본 홈쇼핑 등에서 ‘대박’을 터뜨리며 ‘진부함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조운호의 힘은 뭘까. 4년째 (주)얼쑤를 이끌며 건강음료의 기반을 다지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조운호의 8할은 ‘숙명에 대한 순응’과 ‘승부 근성’= 조 대표에게는 ‘샐러리맨의 신화’ ‘히트상품 제조기’ 등의 별칭이 따라붙는다. 이 같은 별칭을 낳은 것은 ‘나에게 오는 일은 절대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그의 신념과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장을 보는 승부 근성 때문이다.
그의 신념은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후 시작됐다. 그는 동생 3명의 앞길을 돌봐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3남1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일찌감치 가족 생계에 보탬을 주기 위해 일단 공부 욕심을 접었다. 대신 상업고등학교를 택했다. 그 이후에도 잘나가던 은행에서 웅진그룹으로의 전직, 만년 적자 계열사였던 웅진식품으로 이동 등 자신에게 다가오는 변화를 두 팔 벌려 끌어안았다.
숙명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인 뒤엔 지독한 승부 근성이 발현됐다. 상업고를 택했지만 공부에 대한 갈망은 포기할 수 없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취업도 하고 야간대학에서 공부를 다 할 수 있다”는 고 1 때 담임 선생님의 말에 그는 3년 동안 매일 아침 소주잔 1잔 정도 분량의 코피를 쏟으며 공부를 했다. 코피가 나오지 않는 날에는 ‘어제 공부를 소홀히 했구나’라는 생각으로 더 몰두해 다음날 반드시 코피를 내고 말았다.
매일같이 ‘피’를 보다 보니 체력이 허해지는 건 당연한 일. 체력장에서 100m 달리기를 하던 중 70m 정도를 달리다 제풀에 넘어졌다. 괜찮냐며 동급생들이 웅성웅성 몰려드는 와중에 노랗게 변한 하늘을 보고 ‘난 정말 전력을 다했구나’라는 뿌듯함을 느끼며 배시시 웃었다는 일화는 그의 지독함을 말해준다.
애연가가 돼버린 그의 현재도 승부 근성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남학생보다 일찍 철드는 여학생들이 자신을 어리게 보는 게 싫어서 고교 3학년 때 처음 담배를 물었다. 멋모르고 들이마신 연기에 놀라 눈물을 뺀 자신을 보고 또래 친구들이 웃어대자 자존심이 상했다. 마침 토요일이었던 다음날 담배를 사서 동네 뒷산에 올랐다. 한 대, 두 대 연기를 삼키며 피워대기 시작했다. 네 대쯤 피우자 머리가 핑 돌면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린 뒤 우선 ‘하산’하고, 다음날 다시 담배와의 승부를 시작했다. 첫 담배를 꺼내 연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신기하게도 맵던 연기가 술술 빨려들어갔다. ‘그럼 그렇지. 제까짓 게 나를 이기겠어’라는 묘한 승리감이 담배 연기를 타고 몸속 구석구석 전해졌다. 그날부터 그는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게 됐다.
▶‘뱅커→신입사원→기조실→부실 계열사’, 터닝포인트의 연속= 3년간 내리 코피를 쏟은 노력은 그에 합당한 보답을 했다. 상업고를 졸업하면서 당시 제일은행에 취직했고, 야간대학에도 입학했다.
몸에 밴 ‘칼퇴근’ 습관은 그때부터 시작했다. 야간수업을 들어야 하니 근무가 끝나자마자 퇴근할 수밖에 없었다. 신입사원이 공부 핑계로 일 안 한다는 ‘뒷담화’를 들을까 봐 출근은 누구보다 일찍 했고, 근무시간 업무집중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웅진식품 대표에서 세라젬의료기 부회장 등을 거치는 동안에도 그는 항상 퇴근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사무실을 나섰다. 대신 퇴근 이후 야간수업을 들었던 것처럼, 대학 졸업 후에도 항상 영어나 무역학 수업, 연극에 이르기까지 뭔가를 배우며 ‘하루 이모작’을 해왔다.
그렇게 잘나가던 은행원으로 9년을 채웠을 즈음, 서울에서 웅진그룹에 다니던 고교동창이 저녁 술자리에서 “우리 회사 올 생각 없느냐”는 말을 건넸다. 당시 은행의 위상을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던 얘기였다. 상업고에서 전교 1등이 가는 곳이 한국은행, 그 이후 상위권이 가던 곳이 일반 은행이었다. 일반 기업체는 상업고 졸업생들이 제2금융권 이후 가장 마지막 순서로 택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 제안이 들어오자마자 귀가 솔깃했다. 조 대표는 “경제ㆍ산업계를 군대로 치자면 은행은 지원부대, 일반 기업은 전투부대 같더라고요. 이왕 내가 경제계에서 일한다면 전투부대에서 치열하게 승부를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전했다. 승부사의 끓는 피가 소주 한 잔과 함께 실려온 소리를 그냥 넘기지 못한 것이다.
은행 경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연봉을 높이지도 못한 채 그저 대졸 2년차 급으로 웅진으로 옮겼다. 젊은 시절 호기는 이런 조건들을 계산하지도 않았다. 계산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기획조정실에서 자금 담당 업무를 하면서 5번 특별 승진을 거듭했으니.
1995년 3월, 또 한 번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기획조정실에서 자금 담당 과장으로 있던 그에게 “웅진식품(당시 웅진인삼)으로 가라”는 단 한 마디의 인사 통보가 내려왔다. 당시 웅진식품은 약국에서 판매하는 인삼음료 등을 주력 제품으로 했던 계열사였다. 월 매출액이 5억원 정도. 해마다 매출이 반 토막 나다시피 실적이 주저앉으며 수십억씩 적자를 쌓아가고 있던 곳이었다.
식품 사업을 접을까 말까를 고민해야 할 판에 그에게 총대가 넘겨진 것이다. 기조실에서 번번이 특별 승진으로 자신의 진가를 입증하던 그에게는 피하고 싶은 이력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역시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에게 오는 환경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순응의 신념’이 발휘된 것이다.
▶신제품과 함께한 승승장구… ‘신들린’ 시간들= 웅진식품으로 온 그에게 내려진 ‘특명’은 간단했다. 구원투수 역할을 할 만한 히트상품을 만들어내는 것.
간단한 명을 실행하는 것은 간단치 않았다. 골머리를 싸매던 그에게 현장을 뛰는 한 영업사원이 “웅진에서 판매하고 있는 약국용 대추드링크가 잘나간다”는 힌트를 줬다.
그 말을 듣고 무심코 판매 수치를 보는 순간, ‘감’이 왔다. 회사의 관심 밖 상품이었지만 3년 새 꾸준히 매출이 오르고 있었다. 그는 바로 단식원을 찾아 소비자들을 상대로 대추음료에 대한 운을 떼보고 리서치사에 의뢰해 정식 조사까지 거쳤다. 소비자 조사에서 “몸에 좋을 것 같다”, “맛있을 것 같다” 등의 시장의 기대를 확인했다. ‘감’을 확신한 그는 “대추음료는 절대 안 된다”던 연구소, 영업팀, 공장 등 각 분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을대추’를 내놨다.
웅진식품에서 그의 첫 작품인 ‘가을대추’는 이름을 짓는 것부터 광고 콘셉트를 정하는 것까지 그가 일일이 머리를 쥐어짜내며 탄생시켰다. 오죽하면 조 대표는 자녀를 묻는 질문에 “첫째는 큰딸 혜원이, 둘째는 아들 같은 ‘가을대추’, 셋째는 아들 동현이, 넷째는 딸 같은 ‘아침햇살’…”이라며 줄줄이 제품명을 댔다.
얼마나 ‘가을대추’에 골몰했던지 꿈도 꿀 정도였다. 그는 꿈에서 ‘가을대추’의 첫 광고 콘셉트를 떠올렸다. 꿈속 계시(?)는 “외국 음료가 판치는 우리 음료 시장에 우리 브랜드를 자리 잡게 하겠다”는 내용. 이는 커피ㆍ콜라ㆍ오렌지주스 등 외국산 재료 일색이었던 음료 시장에 한국 고유의 음료를 시작하겠다는 출사표였다.
결국 소비자와 직접 소통을 통해 확인한 그의 ‘감’은 ‘대박’으로 그 진가를 입증했다. 출시 첫 달 목표는 10만개를 웃도는 선으로 잡았는데, 실제 판매는 40만개를 훌쩍 뛰어넘었다. 출시 이듬해인 1996년 웅진식품의 매출은 360억원에 달했다. 전년 매출의 6배가 넘는 수치였다.
이후 ‘아침햇살’ ‘초록매실’ 등 우리 이름 음료 시리즈가 연이어 히트상품에 오르며 웅진식품의 고속성장을 견인했다. 그 사이 조 대표는 1999년 38세의 나이로 그룹 최연소 최고경영자(CEO)의 자리에 올랐다. 말 그대로 승승장구였다. 신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꿈까지 꿔가며 겪었던 산고(産苦)는 이내 거침없는 도약으로 돌아왔다.
▶소통은 소비자와, 결정은 고집 있게= 조 대표는 신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소비자 조사부터 한다. 그러나 소비자 조사 결과와 그의 판단이 정반대로 떨어지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는 소비자 조사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해석 때문이다.
‘가을대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회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소비자들의 기대를 직접 확인했다. 회장부터 영업팀장까지 모두 반대하는 와중에 무조건 “된다”며 밀어붙일 수 있던 건 이 같은 소비자 조사 결과 덕분이다.
그러나 ‘아침햇살’은 상황이 전혀 반대였다. “쌀로 만든 음료는 맛없을 것 같다”는 소비자 의견이 대세였다. 조 대표는 여기서 역발상을 착안해냈다.
“소비자 기대치가 90%일 때 제품이 85%의 완성도로 나오면 소비자들은 제품에 대해 실망합니다. 한 번은 먹어볼지 모르지만 다시 찾지는 않죠. 그렇지만 소비자 기대가 70%면 똑같이 85%의 완성도를 보이는 제품에 대해 굉장히 만족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 조사 결과가 호의적이라면 그만큼 더 노력해야 하고, 소비자 기대치의 허를 찔러야 한다는 거죠.”
‘아침햇살’의 용기 디자인에 대해서도 조운호식 해석이 적중했다. 당시 그에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10년, 100년이 가도 소비자들이 질리지 않고 계속 찾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조 대표는 이를 위해서는 용기 디자인도 오래도록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모나리자 등 고전적인 회화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사랑받잖습니까. ‘아침햇살’도 순수예술가의 손을 빌려 디자인하면 고전적이고,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품이 나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알게 된 기(氣)예술가 황석봉 선생을 찾아갔다. 다짜고짜 황 선생과 마주앉아 횟집에서 4시간 동안 설득해 용기 디자인을 얻었다. 그때 받은 디자인이 지금까지 ‘아침햇살’에 그려져 있는 원 모양의 수묵화였다.
이후 일반 디자이너가 만든 용기와 황 선생의 수묵화가 그려진 작품이 경합을 벌였다. 소비자 조사 결과는 일반 디자이너의 작품이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못내 아쉬움이 남았던 그는 조사 원데이터를 뒤졌고, 끝내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여 황 선생의 작품을 모태로 용기를 만들었다.
“연령층으로 나눠 보니 10대, 40대는 황 선생의 작품을 높게 평가했고, 20대와 30대가 점수를 짜게 줬더라고요. 10대는 아직 순수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 수묵화 같은 새로운 시도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준 것 같고, 40대는 인생의 굴곡을 다소 겪으며 새로운 제품에 대해 본질을 보는 눈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어요. 20, 30대는 아무래도 화려한 디자인에 끌렸겠죠. 그렇게 해석하다 보니 10년, 100년 갈 쌀음료 디자인으로는 역시 황 선생의 작품이 더 어울리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집을 부려 소비자 조사 결과부터 사내 의견까지 전부 뒤엎은 결정을 내렸지만, 그만큼 확신이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포스트 웅진’… 오매불망 음료 사랑으로 차곡차곡 쌓은 4년= 세계경제포럼 선정 ‘아시아 차세대 리더’ 한국 대표 18인 중 한 명으로 뽑히고(2002년), 신춘 일본경영자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초청강연(2003년)을 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어느덧 내려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2005년 웅진식품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말이 승진이지, 나가라는 얘기였다. 사장했던 사람에게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부회장 승진으로 표현하는 게 당시 사내 관행이었다.
부회장 승진 소식을 들은 그는 바로 “좀 나갔다 오겠다”며 사무실을 만들 필요도 없다고 일러두고 ‘조운호식 세계일주’를 계획했다. 후임에게 부담되지 않기 위해 훌쩍 떠나는 그를 두고 회사에서는 “조운호답다”는 말이 나왔다.
여행의 테마는 ‘무문청감(無門淸感)’. 문턱을 정해놓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오겠다는 목표만 세웠다. 트렌드가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곳을 보겠다며 가장 먼저 정한 목적지가 미국 뉴욕 맨해튼이었다. 한창 맨해튼을 헤매며 최신(最新) 트렌드를 만끽하던 중, 최고(最古)의 도시를 가보자고 결정했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중북부를 2~3주 동안 돌았다. 그럼에도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최신ㆍ최고를 봤으니 최대(最大)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로키 산맥을 2주 동안 돌았다.
“가장 알뜰하게 세계일주하는 방법이죠. 그 이후에 어딜 돌아다녀 봐도 최신은 맨해튼 따라갈 데가 없고, 최고는 로마 따라갈 데가 없습니다. 로키까지 돌고 나니 모든 게 정말 작게 느껴지더라고요.”
4개월 동안 조운호식 세계일주를 한 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나는 일찍이 걷는 법을 배우고 나서 항상 뛰었다. 나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다시는 남한테 떠밀리는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문구가 가슴을 쳤다. 이제부터는 세상에 떠밀리지 말고 주도적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돌아오자마자 사직서를 냈다. 소문이 퍼지자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이 왔다. 그러던 중 세라젬의료기에서의 적극적인 러브콜이 귀에 솔깃했다. 세라젬의 현안이었던 현 사업 활로 모색과 신규 사업을 통한 신성장동력 확보 등이 딱 ‘조운호 스타일’이었다. 글로벌 시장에서 세라젬의료기가 자리 잡게 하는 데에 3년여의 공을 들였다. 이후 신규 사업으로 식품을 하자고 제의했다. 식품을 고집한 데에는 조 대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자신감도 한몫했다.
그러나 식품에 관심없다는 세라젬 측의 말에, 조 대표는 독립을 결심했다. 웅진에서 시작했던 ‘우리 음료 세계화’를 완성해보고 싶었다.
의지는 창대했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사람을 뽑는 일부터 만만치 않았다. 회사 운영에 드는 비용을 아껴야 하니 일당백들만 뽑아야 했다. 그는 “기반이 잘 갖춰진 기업에서 일하는 것과 기반을 하나하나 만들면서 일하는 건 천지차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다시 대기업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사람을 귀하게 여길 것 같아요”라며 멋쩍게 웃는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그간의 고충이 엿보였다.
회사 이름은 ‘얼쑤’. 풍물의 추임새에서 따온 말이다. 풍물 치는 이의 음악을 듣고 청중이 “얼쑤” 하며 흥을 돋워주는 모습처럼, 얼쑤의 노력에 대해 소비자들이 힘을 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얼쑤의 제품은 ‘자연한끼’ ‘자연두유’ ‘S다이어트’ 등 가루로 된 건식음료다. 그는 건식음료는 동결 건조와 발효 등의 공법을 사용해 영양소의 손실을 막은 건강음료라고 강조했다. 화학첨가물을 넣지 않는 등 친환경 가공법을 사용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다행히 얼쑤의 제품들은 ‘제품이 좋으면 길에 물건을 벌여놔도 팔린다’는 그의 지론을 입증했다. 초보 창업자의 솜씨지만 일본 홈쇼핑 채널에서 첫 방송 1시간 만에 2600세트(3억5000만원 상당)가 팔렸다. 2회, 3회 방송을 거듭하는 동안 매출이 15억원 정도까지 뛰었다. 분당 매출이 1000만원 상당. 물량을 대느라 허덕일 정도였다.
그의 꿈은 코카콜라를 넘어서는 음료를 만드는 것이다. “매출 규모도 중요한데, 얼쑤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이왕 음료 사업을 한다면 전 인류의 건강에 보탬이 되고, 전 인류로부터 사랑받는 음료를 만들어야죠. 그러다 보면 코카콜라 같은 세계적인 회사가 한국에도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수억원의 연봉도 뿌리치고 창업이란 가시밭길을 택한 그는 타깃을 ‘전 인류’로 잡았다. 통큰 목표부터 식지 않는 열정까지, 정말 ‘조운호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