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바람 부는 길(5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임원이라도 워낙에 운전을 잘 하니까…”
“단지 자동차 운전을 잘한다는 이유뿐입니까?”
“…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끝까지 숨기려는 의도는 정말 없었습니다. 외국의 경쟁사들에게 비밀로 하려다 보니 일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지요. 권도일 전무 외에는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상위권에 들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단 언론의 관심을 랠리에 쏠리도록 한 뒤에 그 틈을 타서 에어 뮬의 사고를 조용히 수습하려 했던 것입니다.”
재벌 2세는 더 이상 숨길 여력이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높은 양반이 제 속을 훤히 꿰뚫고 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좋습니다. 그 말씀을 믿지요. 하지만 거성에서 ‘에어 뮬’이나 ‘X-호크’를 비밀리에 개발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북한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의 정예군이 X-호크를 타고 북한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북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X-호크가 휴전선 위를 들락날락 해도 그들이 보유한 레이더로는 탐지할 수 없다는 점에 더욱 발끈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보자는 액션인지, 높은 양반은 양복 윗도리를 벗고 넥타이마저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결 부드럽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부드러움 속에는 단호한 명령이 담겨있었다.
“당장 가십시오. 빠른 시일 내로 만나셔야 합니다.”
“어디로 가서 누굴 만나라는 말씀입니까?”
“북으로!”
“……”
“북으로 가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야 합니다.”
“……”
재벌 2세는 진땀이 흘러 변변히 답변도 할 수 없었다. 미처 예측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북으로 가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다니…
“아마 왕 회장님과 함께 가셔야 할 겁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돌아가신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님께서는 소떼를 줄줄이 몰고 북으로 건너가시기도 했잖습니까?”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거성에서 개발 중인 X-호크를 군용으로 변용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어쩌면 비밀에 속하는 제원까지 낱낱이 밝히셔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쯤이야 북에서도 훤히 알아낼 수 있는 사항 아닙니까?”
“물론 그쪽 정보력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예우를 갖추는 척이라도 해달라는 겁니다.”
“북한이 그렇게 우리에게 위협적입니까?”
“일부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만…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야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동안 유민 제련그룹이 대륙 관통 랠리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선주자께서는 유민 제련그룹을 이쯤에서 떨쳐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유민 회장의 능력에 회의를 품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대신 귀하께서 사업을 이어받아 추진하십시오. 그래서 랠리차량이 북한 영토를 관통할 수 있도록 김정은 위원장의 승인을 받아오시라는 겁니다.”
높은 양반은 드디어 핵심을 제시하고 있었다. 중국, 일본을 연계 통과하여 달리는 자동차 경주, 거기에 북한을 포함하자는 계획이었다. 이미 추진해 오던 ‘유민 제련그룹’을 젖혀버리고 대신 그 일을 거성그룹에 맡기겠다는 의도가 너무도 확실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