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바람 부는 길(2)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전진후가 거성그룹 재벌2세를 만난 것은 몬테카를로 랠리가 끝난 지 정확히 한 달째 되던 날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재벌 2세가 전진후를 포섭한 날이 그 때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랠리에서 한심하게도 꼴찌를 마크한 호크아이 팀의 코-드라이버 전진후는 귀국한 이후 아무런 할 일이 없었다. 랭킹에 들지 못했으니 받은 상금도 없었고, 유민 회장의 구미에 맞는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실패했으니 가욋돈 역시 챙길 수 없었다. 이를테면 랠리가 끝나자마자 빈털터리 백수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
그럭저럭 겨울도 끝나가려 하는 중이지만 유민그룹에서는 아무런 후속 제의도 없었다. 꼴찌를 했다는 이유로 폐기처분 해 버린 듯 전화로 안부를 물어보는 횟수마저도 드물어졌다. 그제야 전진후는 자기가 여태껏 유민 회장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유민 회장에게 찾아가 뭔가 화풀이라도 하고 술이라도 퍼마시려던 참에 느닷없이 거성그룹의 재벌2세 전략비서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던 것이다.
“거성그룹이라면 지난 몬테카를로 랠리에서의 라이벌 아닙니까? 적군의 사령관이 어째서 나를 만나자고 할까요?”
“경기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적군이라 하시니 섭섭합니다. 한때 라이벌이긴 했지만 전진후 선수만큼 훌륭한 선수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차제에 다시 만나 술이나 마시며 조용히 사업 얘기를 나누자는 겁니다.”
조용한 사업 얘기? 이런 제의를 어찌 마다할까? 전진후는 대번에 거성의 전략비서 송달민을 만나기 위해 약속장소로 향했다. 한때 도종호 상무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던 로비스트 송달민. 하지만 그는 도종호 상무가 퇴직당한 이후부터 재벌2세의 전략비서 역할을 감당하며 거성그룹의 실세로 부상해 있었다. 그는 강원도 한 스키장으로 전진후를 불러냈는데 웬걸, 그 스키장에는 온통 거성의 로고가 뒤덮여 있었으며 어느새 공사를 했는지 스키장 슬로프와 이어진 아이스링크가 개설되어 있었다.
그 뿐인가? 피겨 스케이팅이나 쇼트트랙 경기쯤은 거뜬히 치러낼 수 있는 아이스링크 주위에는 고가의 외제 차량들을 안전하게 주차시킬 수 있는 파킹캡슐이 들어서는 중이었다. 특수 무진동 컨테이너에 실려 온 외제 명차는 파킹캡슐 속에 안전하게 보관되었다가 차후에 아이스링크에서 관중들에게 선보이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날이면 날마다 특수 무진동 컨테이너에 실려 오는 외제 명차를 보며 거성그룹의 재벌2세는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노이즈 마케팅, 이른바 뱀 장수 바람 잡는 식으로 벌인 이벤트가 이렇게 효과가 크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로 아이스 쇼를 벌이자는 것뿐인데 이렇게 반응이 좋다니 참 놀랍지요? 어때요, 김연아 선수 대신 자동차로 쇼를 하자는 발상 말입니다.”
“역시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그러니까 세계적인 기업의 차세대 리더 아니겠습니까?”
재벌 2세가 스스로 우쭐거리는 말에 로비스트 송달민이 한껏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동안 도종호 상무의 견제로 인해 맺지 못했던 재벌 2세와의 교분을 이번 기회를 통해 단단히 맺으리라 다짐하는 중이었으니 딸랑딸랑! 아부라도 한껏 해야 할 입장이었다.
“왕 회장님께서 30년이 넘은 치타로 랠리 쇼를 벌여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셨다면, 주니어께선 그 언론의 핵을 송두리째 우리나라로 끌어들일 행사를 기획하신 셈입니다. 얼음판을 달리는 자동차… 대단한 발상이지요.”
“주니어? 나를 지칭하는 말입니까?”
“아, 네… 오장님이란 저급한 별명 외에는 마땅한 호칭이 없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주니어.”
“들어볼수록 괜찮군요. 허허! 그건 그렇고, 장차 우리 팀을 빛내줄 전진후 선수는 모셔왔습니까?”
“물론입니다. 바로 이 분이 호크아이 팀의 코-드라이버 전진후 선수입니다, 주니어.”
이 말에 전진후는 이미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역시 그는 단순 무식한 남자였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