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능력 부족한데 넘치는 건 잉여력 미래 포기해버린 무기력한 낙오자들 절망으로 내모는 세상속으로 한발짝
20대 실업자 고군분투기 영화 ‘잉투기’ 백수들의 유럽여행기 다룬 ‘잉여들의…’ 우리사회 서글픈 초상의 진한 페이소스
“문제는 우린 항상 게을러서 매번 일을 미루고 가만히 누워 있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행동은 하지 않고, 생각만 많은 ‘잉여인간’이었다. 그 결과, 우린 다음 학기 등록금을 절반도 마련하지 못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우린 그냥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학교에 있어 봐야 등록금은 물론이고 졸업작품 비용 때문에 또 허덕일 게 뻔했고, 그다음엔 남들처럼 스펙 쌓고 취업 준비해야 하고…. ”(영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중)
“ ‘그분’의 희생정신이 없었더라면 그 전쟁에서 승리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사실 중립연맹의 연대화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두 혈맹 간의 연대였는데, ‘그분’이 해결하기 위해 희생한 거죠. 전쟁에서 승리만 하면 ‘그분’이 군주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였거든요. 그런데 ‘그분’은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신다는 용단을 내리신 거죠. 그때 생각을 하니 피가 끓어오르네.”
“병X, 잉여XX.”(이상 ‘잉투기’ 중)
영화 ‘잉투기’(감독 엄태화)에서처럼 온라인게임의 가상공간에서 편( ‘혈맹’)을 갈라 싸우고( ‘전쟁’), 여기에서 승리해 최고의 자리( ‘군주’)에 오르는, 기성세대들이 보기에는 그저 쓸데없는 짓에 매달리는, 일명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 세대. 다큐멘터리 ‘잉여들의 히치하이킹’(감독 이호재)에서처럼 막대한 대학등록금과 치열한 취업경쟁을 감당 못해 일찌감치 미래를 포기하고 현실에선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젊은 낙오자들. 이른바 ‘잉여세대’들이 스크린을 통해 세상 속으로 나왔다.
학업ㆍ취업ㆍ결혼 시장에서 낙오하고, 온라인 채팅이나 게임에만 골몰하는 젊은 세대들이 자조하며 자칭한 ‘잉여세대’의 세태와 감성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비슷한 시기 한꺼번에 선보여 눈길을 끈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스스로를 ‘잉여인간’으로 칭하는 20대 초ㆍ중반 ‘백수’ 청년 4명의 유럽여행기다. 비행기삯 외에는 거의 무일푼인 주인공들이 막대한 대학등록금과 ‘스펙쌓기’를 포기하고 생애 첫 도전과 성취를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 겪는 모험을 그렸다. 감독인 이호재(24)와 하승엽(22), 김현학(20), 김휘(20) 등 4명의 청년은 대학에서 영화 전공 동료로 만났다. 이들은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여름방학 부업을 하지만, 목표액수의 반도 못 채우고 결국 학교 등록을 포기하는 대신 유럽여행을 도모한다. ‘잉여세대’의 용어로 하자면 넘치는 것은 ‘잉여력’이고, 부족한 것은 돈과 능력이었다. 비행기표 외에는 단돈 80만원과 카메라 한 대뿐이었지만 침대에서 뒹굴며 구상한 계획만큼은 거창했다. 연출과 애니메이션, 조명, 특수효과 등 각자의 특기를 살려 현지 숙박업소의 ‘홍보 동영상’을 찍어주는 대가로 잘 곳과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마지막 여행지로는 록의 고장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유망한 뮤지션을 발굴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뮤직비디오를 찍는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엮어 극장에서 개봉한다는 포부였다. 하지만 유럽이라고 혹독한 현실이 달라질 리 없었다. 도보와 ‘히치하이킹’, 열차 무단 탑승으로 이탈리아 로마에 이른 끝에 결국 계획을 포기하고 유럽에서의 철수를 결정한 순간, 한 현지 호스텔에서 홍보 동영상 제작을 의뢰해온다. 익사 직전의 지푸라기는 곧 구원의 동아줄이 됐다. 그들이 제작한 코믹한 동영상이 현지 숙박업계에서 화제가 되며 여기저기서 제안이 빗발쳤다. 일 대신에 눕고 싶은 ‘잉여’ 증세가 때때로 이들의 발목을 잡고, 종종 좌절과 게으름ㆍ두려움 등이 엄습해오지만 그것을 돌파하는 힘 역시 쓸모없이 엉뚱하고 앞뒤 생각하지 않으며, 남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는 특유의 ‘잉여력’이었다.
이에 앞서 지난 14일 개봉한 ‘잉투기’는 첫주 말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상영 일주일 만에 1만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칡콩팥’이라고 활동하던 이십대 후반 실업자인 청년 태식(엄태구 분)의 분투기를 그렸다. ‘잉투기’는 인터넷의 폐쇄된 가상공간을 벗어나 주인공이 비로소 맞서게 되는 현실의 공간을 상징한다.
최근 10~20대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특유의 세대 및 시대감각은 인터넷과 대중문화를 풍미하는 ‘B급 문화’의 한 저류를 형성하고 있다. ‘잉투기’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이를 뚜렷한 자의식으로 길어올려 스크린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엔 젊은 세대를 절망과 낙오로 밀어내는 우리 사회의 서글픈 초상과 ‘잉여’라고 자조하면서도 나름의 성장과 성취를 이뤄내는 새로운 유형의 패기와 감각이 공존한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