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사랑’으로 들어 올린 은사자 트로피

“영화로 무엇 할 수 있나 계속 질문할 것”

“황금사자 아니어도 충분…힘과 격려 돼”

토론토영화제 이어 23일 국내 극장 개봉

영화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이 12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 수상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PA]
영화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이 12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 수상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PA]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어져 가는 시대에,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상은 그 질문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이창동 감독)

이창동 감독이 신작 ‘가능한 사랑’으로 24년 만에 베니스에서 은사자상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가능한 사랑’은 12일(현지시간) 저녁 이탈리아 베니스 리도섬 살라 그란데에서 열린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 수상작으로 호명됐다.

한국 영화가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수상한 것은 2012년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이후 14년 만이다. 이 감독은 2002년 ‘오아시스’로 베니스에서 감독상(은사자상)을 받은 이후 24년 만에 다시 경쟁부문에 진출해 또 한 번 은사자상을 품에 안았다.

“수 많은 이들의 기다림과 인내로 태어난 작품”

영화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이 12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 수상 후 소감을 전하고 있다. [AFP]
영화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이 12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폐막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은사자상) 수상 후 소감을 전하고 있다. [AFP]

이날 폐막식에서 이번 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매기 질렌할이 ‘가능한 사랑(Possible Love)’을 호명하자, 이 감독은 제작진과 함께 기쁨의 순간을 나눈 뒤 담담한 모습으로 시상대에 올랐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잠시 객석을 둘러본 그는 “24년 만에 아름다운 축제에 저를 불러주신 베니스영화제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소감을 시작했다.

이어 “이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다림과 인내가 없었으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 회상하며 “이 영화를 기다리느라 매일 술을 마셔야 했던 이준동 제작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고 농담 섞인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 감독의 말처럼 ‘가능한 사랑’이 여기까지 오는 길은 쉽지 않았다. 한국 영화가 쉽게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란 어두운 전망 속에서도 감독은 “그래도 영화는 만들어져야 한다”는 믿음으로 작품을 끝까지 붙들었다. 제작자마저 매일 술잔을 채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인고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 사이 마지막까지 붙잡았던 극장 개봉 계획은 무산됐고, 감독이 넷플릭스가 내민 손을 기꺼이 잡으며 비로소 영화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 감독은 이날 시상대에서 넷플릭스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믿고 제작해 준 넷플릭스에게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오래전에 접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저와 함께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준 오정미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며 “현장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배우들, 스태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황금사자 아니어서 실망? 이걸로 충분”

영화 ‘가능한 사랑’ [넷플릭스 제공]
영화 ‘가능한 사랑’ [넷플릭스 제공]

이 감독이 ‘버닝’(2018)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와 그의 아내, 다큐멘터리 감독과 그의 남편 등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부부가 만나 숨은 욕망을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밀양’(2007) 이후 이 감독과 재회한 전도연, ‘박하사탕’(2000)과 ‘오아시스’에 이어 이 감독과 세 번째 호흡을 맞춘 설경구, 그리고 조여정과 조인성이 주연했다.

‘가능한 사랑’은 지난 6일 베니스에서 7분간의 기립 박수 속에 성공적으로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마쳤다. 노동의 가치가 무너지고 단절이 일상화되는 오늘날, 이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진 질문과 메시지는 공개와 동시에 베니스 평단을 매료시켰고, 이후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돼왔다.

첫 상영 이후 미 매체 버라이어티는 “이창동 감독이 아름답고 성숙하며, 조용히 거대한 드라마로 돌아왔다”고 평가했고, 영국 영화 전문지 스크린데일리는 “‘가능한 사랑’은 ‘버닝’에 이어 계급과 욕망에 대해 또 한번 불안하고 수수께끼 같은 탐구를 선보이며, 이창동 감독의 강렬한 베니스 복귀를 알렸다”고 전했다.

지난 6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과 설경구, 전도연, 조여정, 조인성 [AP]
지난 6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가능한 사랑’의 이창동 감독과 설경구, 전도연, 조여정, 조인성 [AP]

여기에 폐막식을 앞두고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이 ‘가능한 사랑’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황금사자상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더 커졌다. 심사위원단은 “착취와 계급, 환멸, 사랑과 욕망을 비롯해 이야기를 소유하고 전달하는 행위의 윤리까지 탐구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기대와 달리 이번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은 마이 엘투키 감독의 ‘우먼 언노운(Woman Unknown)’에게 돌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덴마크를 배경으로, 독일군 병사와 관계를 맺었던 과거를 숨긴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여성 마리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당초 유력 후보로 꼽혔던 만큼 아쉬움이 남을 법도 했지만, 이 감독은 시상대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오히려 만족과 기쁨에 찬 소감을 전했다.

그는 넷플릭스를 통해 전한 수상 소감에서 “황금사자가 아니어서 실망하는 분들도 계신데 저는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며 “수상 그 자체보다 베니스에서 영화를 처음 공개하고 관객과 처음 만난 경험, 그리고 그 관객들의 표정과 반응 속에서 오간 감정이 저에게 더 큰 의미와 힘이 됐다”고 말했다.

닻 올리는 오스카 레이스…“이제부터 시작”

지난 6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가능한 사랑’ 포토콜에서 이창동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화통신]
지난 6일(현지시간)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가능한 사랑’ 포토콜에서 이창동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화통신]

이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에 기꺼이 함께해준 배우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이어진 토론토국제영화제 참석 일정 탓에 현장에서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한 아쉬움도 전했다. 그는 시상대에서 “이 상은 여러분들의 것”이라며 배우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리기도 했다.

이 감독은 “배우들이 토론토에서 동영상으로 시상식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연락을 나눴다”면서 “배우들이 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앙상블에 대해 많은 분들이 칭찬을 해줬다”고 밝혔다.

‘가능한 사랑’은 지난 10일 개막한 제51회 토론토국제영화제(TIFF)로 무대를 옮겨, 오는 14일 스페셜 프레젠테이션 부문을 통해 북미 관객과 만난다. 앞서 이 감독은 한국 감독 최초로 올해 영화제의 트리뷰트 어워즈 ‘TIFF 에버트 감독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에버트 감독상은 독창적인 비전과 영화적 혁신을 보여준 감독에게 영화제가 수여하는 상이다.

영화는 오는 9월 23일 국내 일부 극장에서 일정 기간 관객을 만난 뒤, 11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스트리밍된다. 내년 초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한국 대표 출품작이기도 하다.

영화 ‘가능한 사랑’ [넷플릭스 제공]
영화 ‘가능한 사랑’ [넷플릭스 제공]

수상의 영광과 함께 베니스 여정을 마무리한 이 감독은, 이번 영화제가 앞으로 이어질 긴 여정의 시작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제 처음으로 여기서 관객을 만나게 됐는데, 이제부터 저는 시작이라고 본다”며 “많은 관객들과 만나서 이 영화를 통해 얼마만큼 서로 소통하고, 영화에서 하려는 이야기를 관객과 공유하고 서로 공감하게 될지 굉장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영화를 만들면서 항상 제가 만드는 영화가 저 자신에게도 의미가 있고, 관객들에게도 의미가 있고, 영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며 “이 영화가 앞으로 관객 여러분들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가기를 바란다. 이 상이 저에게 그런 힘과 격려가 되어 주는 것 같다”고 전했다.


balm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