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제주 바다서 입적, 봉은사에 빈소
운동권 학생 통해 ‘광주’ 비디오 접해
사회 참여 나서며 ‘운동권 스님’ 각인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맞선 삶 추모”
봉은사 주지를 지낸 명진스님(속명 한기중, 세수 76세·법랍 52년·사진)이 제주 서귀포에서 입적하면서 불교계 안팎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스님의 장례는 25일 종교시민사회장으로 엄수된다.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봉은사 선불당에 마련된 명진스님의 빈소에는 불교계 관계자와 봉은사 신자, 일반 시민 등의 발길이 이어졌다.
2006∼2010년 봉은사 주지를 지낸 명진스님은 2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하예포구 인근 해상에서 물에 떠 있는 채로 구조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사망했다. 스님은 몇 년 전부터 제주도에서 프리다이빙 훈련을 했으며, 구조 당시에도 마스크, 스노클, 다이빙수트, 핀 등의 장비를 착용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명진스님은 1969년 성철스님을 은사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했지만 곧 입대해 월남전에 참전했다. 이어 1974년 다시 법주사에서 탄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4년 법주사에서 사미계를, 1976년 쌍계사에서 구족계를 수계했다. 이후 스님은 1985년 해인사에 숨어든 경북대 운동권 학생들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 비디오를 본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 참여에 나서며 이른바 ‘운동권 스님’이 됐다.
1986년 봉은사에서 신군부의 불교계 탄압 사건인 10·27 법난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구속됐다. 1987년에는 불교탄압대책위원장, 1988년에는 대승불교승가회 회장을 맡아 불교 자주화와 사회 민주화에 전념했다.
1994년 대한불교조계종 종단 개혁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후 조계종 종단개혁회의 상임위원,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봉은사 선원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장,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 등으로 일하며 통일 운동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는 일에 매진했다.
2006년 봉은사 주지에 취임해 2010년까지 일신했고, 유일한 개인 재산이었던 토굴을 정리해 지역아동센터 ‘달마학교’와 사회복지법인 ‘봉은’을 설립하기도 했다. 2011~2014년에는 수행모임 단지불회 회주를 맡았다.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 실업자연대 이사장, 6·15 공동선언 남측준비위원회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명진스님의 입적에 각계에서는 잇따라 추모의 뜻을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은 22일 페이스북을 통해 “대한민국 불교계의 큰 어른을 떠나보내게 된 슬픔을 온 국민과 함께 나눈다”고 애도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섰으며,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맞서 고초를 피하지 않으셨던 스님의 삶을 추모한다”고 적었다.
전국시국회의도 논평을 통해 “명진스님은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불교계 개혁을 위해 앞장섰고, 권력과 기득권의 부당함에 맞서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며 “정의와 양심의 정신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스님이 공동 후원회장을 맡고 있던 백기완노나메기재단은 “고(故) 백기완 선생과는 70∼80년대 민주화운동부터 각별한 사이였다”며 고인이 보여준 “사회 정의를 위한 한결같은 행보”를 기렸다.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 후보인 정념스님은 “명진스님은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불교계의 자정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늘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였다”며 “불교계의 큰 별로서 치열하게 시대의 격랑을 껴안으셨던 스님”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명진스님의 장례는 종교계와 시민사회, 문화예술계, 정계 인사 등이 참여하는 장례위원회 주도로 오는 25일 오전 10시 영결식이 엄수되며, 법주사에서 다비식이 진행된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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