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떠난 서툰 복수 여정
웃음과 눈물 뒤에 숨겨둔 가족들의 상처
“‘용서가 모든 걸 해결해 주나?’ 질문 던져”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영화 ‘경주기행’은 캐스팅 라인업부터가 흥미롭다.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그리고 변요한까지.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배우들을 한 영화에서 만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개봉일이 기다려진다. 든든한 배우들과 함께 부단히 ‘결전의 날’을 향해 달려온 감독의 얼굴에도 설렘이 가득하다.
“워낙 쟁쟁한 분들이 캐스팅됐잖아요. 이분들을 모셔놓고 욕먹는 결과물을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독립영화의 신성, 충무로의 주목받는 신예에서 이제 상업영화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감독의 심경이 너무 솔직해서 괜스레 웃음이 났다. ‘경주기행’의 김미조 감독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경주기행’은 김미조 감독의 첫 상업영화다. 장편 데뷔작 ‘갈매기’(2020)로 전주국제영화제 대상을 거머쥐며 단숨에 주목받은 한국 영화계 최신예의 작품이다. 성폭력 생존자가 된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주목했던 ‘갈매기’에 이어, 이번엔 범죄 희생자의 가족과 애도, 복수라는 화두로 시선을 옮겼다.
서툰 복수극에 담긴 가족의 마음
8년 전 막내딸 ‘경주’를 잃은 엄마 옥실과 세 딸이 살인범에게 복수하기 위해 경주로 떠나는 여정. 날파리 하나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네 모녀가 단체 티를 맞춰 입고 결연히 떠난 서툰 복수극에는, 가족이란 틀 안에서 각자 가슴에 담아두고 살아온 상처와 애환, 복수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마음속 불덩이가 뒤섞여 있다.
존재만으로도 우리를 웃게도 울게도, 하물며 복수라는 위험한 결심까지도 하게 만드는 것이 가족이라면, 이 복수극의 옷을 입은 영화는 너무나도 솔직한 ‘가족의 영화’다.
감독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한 것은 2014년이었다. 가족과 ‘경주’를 찾은 그에겐 수학여행의 성지가 숨기고 있던 도시의 또 다른 분위기와 질감이 눈에 들어왔다. 일상과 능(陵)이 공존하는 곳, 산 사람과 죽은 이가 함께 존재하는 느낌이 색달랐다. 밝은 면 이면에 존재하는 ‘경주’의 음습한 면은 가족을 위한 복수라는 영화의 배경으로 더없는 선택이었다.
“가족과 함께 대릉원에 갔는데, 갑자기 비가 왔어요. 편의점에서 우비를 사 입고 걸어가는데, 뒤에서 따라가다 보니 다들 마치 누군가를 죽이고 내려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때 찍은 이미지가 ‘경주기행’의 시작이었어요. 관광지에서 복수극이 펼쳐진다는 아이러니도 매력적이었죠.”
김 감독은 2021년 ‘경주기행’의 초고를 썼다. 이 가족의 여정이 ‘필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막내에게 ‘경주’란 이름을 붙였다. 초고에서 영화는 옥실(이정은 분) 중심의 드라마였고, 딸들은 다소 지켜보는 위치에 가까웠다.
감독은 작업을 거듭하며 ‘딸들은 각자 어떨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이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했고, 실제 영화에서는 옥실만이 아니라 첫째 장주(공효진 분), 둘째 영주(박소담 분), 셋째(이연 분), 살인범 백성현(변요한 분) 등 모든 캐릭터가 존재감을 가지고, 각자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 김 감독은 “인물 하나하나가 도구적으로 쓰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배우들이 함께해주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정말 ‘어벤져스급’ 캐스팅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캐릭터 구축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모든 캐릭터에게 키신(key scene)을 주고,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돋보이는 장면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스태프들과 시나리오 회의도 많이 하면서 캐릭터에 대한 아이디어도 많이 나눴던 것 같아요.”
딸의 죽음과 복수라는 큰 흐름 안에는 저항할 수 없는 웃음들이 있다. 처음부터 ‘블랙코미디’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극을 비극으로만 보지 않는 감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극 안에 녹아들었다. 김 감독은 새해에 딸의 작품이 ‘7000만 영화’가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의 설정처럼, 김 감독은 실제로도 네 자매의 막내다.
“저는 이야기 자체를 제 안에서 출발하는 편이에요. 시나리오가 곧 저죠. 인물들도 제 안의 작은 부분들을 확대해서 만드는 편이고요.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유머러스한 분이어서, 우리 가족도 심각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경주기행’도 결국 제가 쓴 시나리오이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제 방식이 자연스럽게 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상업 영화 데뷔? 큰 그림 보는 법 배웠다”
얼렁뚱땅 어설프기 짝이 없는 가족의 복수극은 첫째란 이유로, 둘째란 이유로, 그리고 셋째란 이유로 각자의 책임감과 상처를 떠안고 살아온 딸들의 얼굴을 거쳐, 결국엔 홀로 백성현과 마주한 옥실의 얼굴에서 멈춘다.
일말의 고민 없이 쉽게 사람을 죽이는 백성현과 달리, 그토록 바랐던 순간을 눈앞에 두고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이 딸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할까 봐 걱정했다는 옥실. 복수의 과정은 힘겹기 그지없고, 그건 복수에 나선 이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죄를 ‘용서해야 한다’곤 하죠. 하지만 용서를 하면 다 해결이 되는 걸까요. 만약 용서를 하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는 걸까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그런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당사자에겐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결국엔 복수를 완성해야 옥실 안의 불덩이가 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김 감독은 데뷔작으로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상업영화에 뛰어들자 또다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 보였다. 촬영 시간이 제한적인 현실 탓에 초반에는 스트레스도 컸다. 촬영 회차가 거듭되면서 김 감독은 한 땀 한 땀 신을 그려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번 영화를 만들며 그는 ‘영화는 한 컷 한 컷이 아니라 장면들로 이뤄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현실과 타협해 가면서 점차 큰 그림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과정에서 나름의 노하우도 생겼죠. 날씨 사정으로 촬영 기간이 좀 늘어나기는 했지만, 하고 싶었던 건 거의 다 한 것 같아요. 이 정도면 선방했어요.(웃음)”
감독으로서 막 새로운 챕터를 넘긴 그는 ‘경주기행’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가족의 이야기를 충분히 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은 그는 다음 주제를 바라본다. 물론 그보다 시급한 것은 영화가 손익분기점(120만)을 넘기는 것이다. “해내야만 한다”는 그의 말이 더없이 비장하다.
“‘경주기행’에서 가장 그리고 싶었던 것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가족이 붕괴하지만 그러면서 각자가 자기 자신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였어요. ‘갈매기’를 만들고 난 뒤 다음 화두로 넘어갈 때가 됐다고 느꼈던 것처럼, 가족 이야기를 하고 난 지금도 다른 화두로 넘어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봉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요. 무엇보다 손익분기점을 넘겨야겠죠. 할 수 있고, 해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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