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참 빨리 변한다. 요즘은 더더욱 그러하다. 2010년 근방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익숙해져 갈 때쯤만 해도 기술의 변화가 이렇게 빠를지 예상치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뼛속부터 문과생인 필자는 스마트폰의 의미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화와 텍스트만 이용하는 사람은 굳이 스마트폰을 쓰지 않더라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시기인 것으로 기억한다. 기존의 컴퓨터(PC)에서만 사용하던 메신저를 이동 중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 인터넷을 어디에서나 접속할 수 있는 것, 해외와의 통화 비용을 아낄 수 있는 것 등의 ‘편리함’ 이 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술이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는 기존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다.

그로부터 10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이라는 또 다른 기술 혁신을 맞이했다. 많은 사람이 이제는 생성형 AI와 함께하는 생활에 너무도 익숙해지고 있다. 스마트폰의 등장이 가져다줬던 ‘편리함’이 아닌 ‘일상’을 함께 하는 ‘대체와 공존’의 상반된 의미가 자리 잡고 있다. 분명히 기존과는 다른 양상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사람이 하는 일을 AI 가 대신하는 영역이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모두가 알고 있고, 이야기한다. 앞으로의 세상은 달라질 거라고. 그리고 우리는 많은 직업을 잃고 방황할 거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러한 전제가 옳다고 한다면 극단적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AI에 맡기는 편리함을 넘어서서 세상에서의 역할을 스스로 없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I를 ‘이용할 줄 아는 자’에서 ‘의존하여야만 살아가는 자’로 변하는 세상이 올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빠른 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할 수는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세상을 담당해야 하는 의무 또한 지닌다. 사회 구성원인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 도구로서의 AI 역할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교육해야 하는 이유이다.

1936년 상연된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는 산업화한 사회에 대한 풍자를 통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현대인이 삶을 묘사했다.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그 시대 삶을 상징성 있게 보여줘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력의 대체라는 대표적 장면으로 언급하곤 한다. 그에 반해 2025년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의 일터는 2030년대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서 보여준 노동력의 대체품으로서의 기계가 등장하지 않는다. AI로 대체되는 급변하는 일터에서는 ‘내 노동력의 대체품’ 이 규격화되지 않는다. 이미 변한, 그리고 앞으로도 변할 세상에서 나를 대체할 무엇을 실체로써 규정할 수 없는 이 상황은 우리가 이미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무력감 앞에서 기존과 같은 방식으로는 세상을 마주하기 힘들다. 적어도 교육의 영역에서는 기술 습득은 별론으로 하고, 각 개인이 효율성을 남보다 확보할 때 인정받는 사회를 가르치기보다는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하여 학습하고, 교육해야 할 적기다. 사람을 대체하는 도구가 아닌 공존의 대상으로서 AI를 개념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가치 확산에 보다 집중하여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윤진 건국대 건강고령사회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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