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무용수에서 예술 행정가로
예술 향유하는 세대 감각 달라져
빠른 호흡과 느림의 미학 보여줘야
여전히 매일 아침 5시 일어나 운동
“발레는 나의 언어이자 소통하는 춤”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샤이닝 웨이브’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540e0480a8444a3183445a88e2e6da43_P1.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깊은 밤바다의 숨결은 고요해, 별들은 물결 위에도, 매달려 반짝이고, 어둠이 짙을수록, 그 반짝임은 평온하여, 아이들은 금빛으로 부서지는 파도의 둥근 요람에 누워 잠든다” (‘샤이닝 웨이브’ 정영의 8개의 연시 中)
짙고 푸른 물결이 소녀의 손끝을 스치고 그 위로 커다란 고래가 유영한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서 아직은 이루지 못한 꿈을 꾸듯, 소녀와 고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난 4일 대한민국발레축제 무대에 오른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의 창작 발레 ‘샤이닝 웨이브’다. 이 단체의 공연이 서울 무대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샤이닝 웨이브’를 이끈 주인공은 김주원 부산오페라발레단 예술감독. 무대엔 국립발레단의 스타 무용수에서 퇴단 이후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온 창작자로, 이젠 예술행정가로 영역을 확장한 김주원의 발레를 향한 꿈과 미래가 담겼다.
요즘 김주원의 스케줄은 ‘나노’ 단위로 짜인다. 하루 24시간이 촘촘히 채워진 일정표를 뚫고 만난 김주원은 “무대를 너무나 사랑해 언제나 무대에서 죽고 싶다고 이야기한다”며 “발레의 영역 안에서 역할이 많아졌지만 어떤 형태로는 춤으로 소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주원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예술감독 [EMK엔터테인먼트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7c7183eff63d4058a9a8fe2eebc11e17_P1.jpg)
스타 무용수에서 40대 행정가로…김주원이 고민하는 ‘발레의 미래’
‘고래, 바다, 파도….’
부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에서 발레를 시작한 김주원 감독은 신작 작업을 앞두고 무려 20개의 키워드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가 자라던 시절의 부산과 비교하면 “너무도 미래 도시가 됐다”지만, 김주원에게 이곳은 하늘처럼 파란 바다를 친구 삼아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꿈을 꾼 곳이다. 그에게 바다는 어떤 일도 포용하고 안아주는 곳이었다. 새 창작 발레를 구상하며 그는 시인 정영에게 시(詩)를 부탁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부산에서, 관객과 예술이 만나고 음악과 관객이 만나듯 몸으로 쓰는 시(詩)라는 새로운 발레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김주원 감독의 이야기다. 이 발레 자체가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의 정체성인 것이다. 8개의 연시로 스토리텔링 한 ‘샤이닝 웨이브’(Shining Wave, 윤슬)가 태어난 계기다.
“제겐 우리 발레단 단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윤슬 같았어요. 저를 보고 발레단에 와준 단원들의 반짝거림과 춤이 저 멀리까지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명한 스토리와 구성, 서사를 함축한 우아하고 다채로운 안무, 흰 물결과 별이 반짝이는 바다와 하늘, 이미지와 분위기를 긴밀히 연결하는 음악까지. 무대는 ‘보고 듣는 예술’인 발레를 한 편의 동화로 꾸몄다. “바다를 보며 치유하고 위로받으며 동심을 느끼는 마음을 담아 만든” 공연이 바로 ‘샤이닝 웨이브’다.
그는 예술감독이 돼 미래 세대 무용수를 발굴, 부산예고 학생들에게 설 무대를 만들어줬고 신진 안무가 박소연을 발탁해 무대를 맡겼다. 김주원은 안무가에 대해 “뿌리를 알 수 없는 춤이 아닌 클래식 발레를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안무가”라며 “독특하게 음악을 사용하고 본인의 색깔을 녹여내면서도 깔끔한 춤을 만든다. 지금도 너무나 멋진 안무가이지만 내일은 더 기대된다”고 말했다.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 ‘샤이닝 웨이브’ [부산오페라하우스발레단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916fb344998c42a793db8fd653dd19e6_P1.jpg)
창작 발레를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발레 불모지’나 다름 없었지만, 지난해 부산오페라하우스 발레단이 창단한 이후 부산에서도 발레에 관한 관심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소극장 공연인 ‘디어 발레리나’는 5분 만에 매진됐고, 지난달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올린 ‘샤이닝 웨이브’의 2회 공연 역시 금세 동이 났다.
김주원은 그가 거친 스승들을 닮았다.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 단장,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단장, 그를 ‘동양의 뮤즈’라고 했던 러시아의 발레 거장 유리 그리고로비치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완벽주의자’ 성향은 예술감독으로 단체를 이끌 때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스스로를 “최태지, 문훈숙 단장님을 통해 만들어진 예술가”라고 말한다.
“제가 눈이 나빠 연습이나 리허설에 안경을 끼는데, 단원들이 안경을 끼지 않을 땐 너무 친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땐 잘 안 보이거든요. 근데 안경만 쓰면 1초마다 끊으며 지적한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국공립단체를 이끌게 되자, 그는 “춤만 출 때는 몰랐던 것을 많이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일당백의 노력’이 모여 무용수에게 마음 편히 춤만 출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줬다는 것도 체감한다. ‘춤만 추던 시절’의 일이 까마득해지고, 어느덧 그는 “여러 행정적 부분에서 타협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요소가 많다는 것, 이제 불같은 나는 사라지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하루하루 알아가고 있다”며 웃었다.
무대 아래에서 ‘현재의 삶’을 뜨겁게 살아가는 그의 시선은 언제나 ‘발레의 미래’로 향한다. 그는 “이젠 조금 더 멀리 보며 제가 발레계에,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기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신진 안무가를 발굴하고 무용수를 육성하기 위해, 지역에서도 무용수들이 안심하고 춤출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그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롤랑 쁘띠 안무의 ‘아를르의 여인’에 출연한 김주원 [본인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178231c900044efa8e725f110606c010_P1.jpg)
지난해 ‘스트릿 우먼 파이터’ 시리즈를 만든 엠넷의 순수무용 경연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에 마스터로 출연했던 것도 순수무용을 어떤 방식으로든 알리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1분 안에 무용수가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데 걸어 나오는 데만 해도 5분을 써야 하는 무용수들에겐 쉽지 않겠다 싶어 이건 불가능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다”고 말했다. 출연을 승낙한 것은 그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요즘 시대엔 1분 안에 모든 것을 보여줘야 사람들이 이 무용수들의 공연을 보러온다는 제작진의 이야기에 설득됐다”고 했다.
발레를 춰온 지난 수십년간 그는 ‘발레의 대중화’를 고민했다. 김주원은 “요즘은 예술을 향유하는 세대의 감각이 달라졌다. 이젠 4시간짜리 전막 발레를 보는 시대가 아닌 선택적으로 원하는 것만 접하는 시대가 됐다”며 “이제는 시대에 발맞춰 발레도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올해로 15주년을 맞은 대한민국발레축제는 김주원 예술감독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발레의 역사를 쓴 최태지 문훈숙을 시작으로 ‘스테이지 파이터’를 통해 스타 무용수로 떠오른 강경호 신민권 정성욱의 무대를 훑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100년도 되지 않는 한국 발레의 역사 안에서 200년에 가까운 발전을 이루게 한 것이 바로 최태지 전 단장님과 문훈숙 단장님”이라고 했다.
“어느 한쪽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젠 두 가지를 함께 해야 하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선택적 시대’에 맞춰 빠른 호흡의 대중발레를 보여주되 그 안에서 ‘느림의 미학’을 마주할 수 있는 클래식 발레로 함께 소통하고 싶어요. 빠른 세상에서도 클래식의 가치를 보여주고, 발레가 변화와 혁명도 대처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김주원 ‘사군자:생의 계절’ [본인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0669bca7b10242fca245356751bd8d43_P1.jpg)
도태되는 것이 싫었던 무용수의 삶…“발레는 내게 가장 편한 언어”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일이 없었다. 무용수로, 예술가로 살아온 시간은 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세상은 그를 ‘도전의 아이콘’이라 부르지만, 그는 자신의 시간이 ‘도전적 삶’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단지 전, 저 자신이 머무르거나 고여있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머물거나 고이면 결국 썩게 마련이잖아요. 도태되거나 썩은 사고를 하는 것이 전 싫어요. 그런 사고로는 사람들에게 예술가로서 좋은 메시지를 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발레는 무용수에게 가혹한 예술이다. 끝도 없이 한계로 몰아붙이고,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혹독한 시간을 보낸다. 무용수들은 그런 이유로 “발레 무용수로 성공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견디고 이겨야 하는 외로운 삶”이라고 말한다. 그 삶을 사는 것이 발레 무용수 모두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한다. 엄청난 완벽주의자가 아니면 올곧게 가기 힘든 여정이기 때문이다.
무용수 김주원은 그 길을 걸었다. 무용수로 무대에 서는 대신 행정가로 무용수의 뒤에 있지만, 지금의 그는 “달라진 것은 없다”고 말한다.
![김주원 ‘레베랑스’ [본인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6/09/news-p.v1.20250608.ce51e932ec884e5980271092d8ef6789_P1.jpg)
“춤을 출 때도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200% 이상을 채우려 했어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방식은 늘 같아요. 단지 무대 위에 있던 제가 이젠 객석이나 무대 뒤로 위치를 바꾼 거죠.”
지금도 매일 아침 5~6시에 일어나 2시간 30분간 운동을 하며 무용수로의 몸을 유지한다. 그 시간을 김주원은 “내 몸을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일생을 토슈즈를 신고 살아온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검열을 해왔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 매일의 노력으로 그는 마흔여덟 살에도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관객과 만난다.
심지어 단원들의 발레 클래스에도 빠지지 않는다. “체크하고 싶은 단원 옆에 서서 함께 움직이는데 단원들은 얼마나 싫겠냐”면서도 “무대에 서는 예술가로의 마음과 자세, 그 귀함과 중요함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집에선 늘 흐트러진 모습이라며 웃는다.
평생토록 춤을 춰왔지만, 그에게 발레는 여전히 행복이다. 그는 “춤에 빠진 어릴 적엔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종일 연습실에 있었다”며 “국립발레단이 있었던 국립극장과 예술의전당을 갈 때면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프로 무용수로 무대에 선지 어느덧 28년. 세월의 길이와 함께 역할과 모습을 달리 하지만, 그의 바람은 언제나 발레로 대중과 소통하는 것에 있다. “관객 없이는 춤을 출 수 없기 때문”이다.
“발레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발레는 제게 가장 편한 언어예요. 발레라는 이 언어로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게 발레는 소통하는 춤이거든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