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되는’ 사업철수·자산정리
‘캐즘’에 배터리·충전기 위기
프로젝트 중단·구조조정까지

올 들어 국내 기업들의 비주력 사업 중단 및 자산 매각 움직임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4대 그룹을 필두로 대기업 전반에 걸쳐 ‘돈 안 되는’ 사업은 빠르게 접고, 성장성과 안정성이 담보된 주력 사업에 ‘올인’하는 양상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전통 산업과 첨단 산업을 가리지 않고 불황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비상경영의 일환으로 사업·자산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글로벌 공급 과잉과 수요 부진에 시달리는 석유화학·철강 등 전통 산업은 물론 중국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첨단 산업에 이르까지 전 산업에서 사업 재편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는 기둥 사업인 반도체에서 ‘선택과 집중’에 나섰다. 구형 범용 생산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포함한 첨단 D램 중심으로 사업 체질 전환에 나선 것이다. 최근 공상시보 등 대만 언론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대만 고객사들에게 6월을 끝으로 DDR4와 저전력 버전인 LPDDR4의 주문이 중단될 것이라고 공지했다. DDR4와 LPDDR4는 상용화된지 10년이 넘은 대표적인 구형 제품이다.
SK그룹은 매각과 구조조정 등 칼을 빼들고 그룹 ‘리밸런싱’을 진행 중이다.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시기에 발빠른 결단을 내려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주력 사업을 재정비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세계 3위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인 SK실트론의 지분 매각을 추진 중이다. 지난달에는 그룹 내 우량회사인 특수가스 생산계열사 SK스페셜티를 매각하고, 약 2조7000억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각 계열사도 ‘돈 안 되는’ 자회사를 매각하거나 사업을 중단하며 ‘슬림화’에 나서고 있다.
SK에코플랜트는 리뉴어스, 리뉴원 등 수처리·폐기물 사업 부문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SK지오센트릭은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을 무기한 연기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배터리 원재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2022년부터 인도네시아 정부와 추진하던 11조원 규모의 배터리 밸류체인(가치사슬) 구축 프로젝트를 철회했다. 또한, 중국 1위 코발트 생산업체 화유코발트와 설립한 배터리 리사이클 합작법인(JV)의 공장 설립도 순연했다.
포스코홀딩스 역시 중국 CNGR와 손잡고 추진하던 이차전지용 니켈 합작 공장 프로젝트를 중단한 상태다.
LG전자는 2022년 시작한 전기차 충전기 사업을 3년 만에 종료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관련 업무를 하던 직원들은 다른 사업 조직으로 전환 배치하고, 전기차 충전기 제조를 담당하는 자회사 하이비차저는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
SK그룹의 전기차 충전기 사업을 담당하는 SK시그넷 역시 이달 직원들을 대상으로 첫 희망퇴직 신청을 받으며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SK시그넷은 지난해 2428억원의 손실을 내며 2년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이 야기한 불확실성 탓에 기존 사업 계획을 수정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LG전자는 인도에서 진행 중인 기업공개(IPO)를 연기했다. 당초 다음달 말 인도 증시에 상장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시장 상황 등을 이유로 속도 조절에 나섰다. 조주완 LG전자 최고경영자(CEO)는 24일 서울대 특강을 마친 후 관련 질문을 받자 미국발 관세에 따른 불안정한 상황을 언급하며 “6월이 될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글로벌 불확실성이 큰 만큼 몇 개월 정도 지켜보려 한다”고 말했다.
경제단체 한 관계자는 “시장 성장이 지연되고 불확실성이 심화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신속한 경영 판단을 못한다면 생존조차 담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며 “이 시기에 비핵심 자산을 과감히 정리하는 결단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김현일·김민지·고은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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