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모습이 공존한다. 딱 외유내강형의 배우다. 바로 영화 ‘26년’으로 돌아온 배우 배수빈의 이야기다.
배수빈은 이번 영화에서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주안 역을 맡았다. 진구, 한혜진, 임슬옹과는 달리 과거의 아픔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배수뷘은 더욱 관객들의 이해와 공감을 자아내는 연기를 펼쳐야 했다. 감정 표현에 있어 크게 오버하지 않고 적정선을 지켰다.
매 작품마다 과감한 시도와 변신을 아끼지 않는 배수빈을 최근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26’년은 어떤 영화보다 사회적 메시지가 강하다. 선뜻 출연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수빈은 오히려 자신에게 이런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에 감사했다. 민감한 주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본분인 연기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정말 신경 쓰지 않았어요. 민감한 주제의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뒀죠.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어떤 일을 참여할 때건 마음이 내켜야 하는 편이에요.”
이번 영화는 즐거운 시간임과 동시에 어떤 작품보다 긴 고민을 거친 작품이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유족들의 아픔을 과연 잘 그려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게를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죠. 그 생각이 짐처럼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 생각을 저만 하고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 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 그리고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였죠. 그런 염원이 모여서 이 영화가 완성된 것 같아요. 또 많은 분들이 기다려주시고, 함께 힘을 보탠 영화잖아요. 최대한 제 연기로 주안의 아픔을 표현하려 했죠.”
원작 웹툰과는 달리 영화 속 주안은 객관적이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인물이다. 침착한태도로 일관하다 결국에는 감정이 폭발하고 마는 주안의 모습은 관객들의 마음을 쓰리게 만든다.
“결국 주안도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걸 보는 우리 관객들의 시선 역시 편하지 않죠. 막상 그 당시를 겪어보지 않았어도 기본적인 그런 아픔은 가지고 있잖아요.”
배수빈 역시 군부 독재 시절을 겪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남아 있는 잔상을 떠올렸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 아픔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제 기억상으로는 초등학교 시절 데모를 몇 번 봤던 것 같아요. 그 때는 너무 어릴 때니까 딱히 생각이 없었죠. 그 당시 최루탄을 맞았는데, 코가 너무 매웠어요. 사람들이 어떤 사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잘 몰랐죠. 나이가 들면서 근 현대사를 돌아보면서 점점 알게 됐어요. 그 분들의 아픔을.”
2008년 이 작품이 처음 제작됐을 때 원년 멤버인 진구가 맡은 캐릭터는 바로 주안이었다. 그러나 4년이라는 시간과 제작이 몇 번씩 엎어지면서 캐릭터 역시 변화를 맞게 됐다.
“저는 원래부터 주안 역을 제안 받았어요. 4년 전에는 진구 씨가 주안이었고, 류승범 씨가 진배였죠. 4년의 숙성과정 끝에 제가 뜻밖에 주안으로 캐스팅됐죠. 어찌 됐든 잘 맞는 옷을 잘 입는 게 연기자의 본분 아니겠어요. 저는 배역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살고 있는 과정에서 얼굴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그것에 따라 배역이 오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앞으로도 더 좋은 배역들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 역시 인연이고, 저는 그 인연에 대해 늘 촉을 세우고 있죠.(웃음)”
어떻게 보면 주안은 다른 캐릭터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엘리트한 인물이기도 하다. 배수빈은 “태생 자체가 다르다”고 농을 치며 웃어 보였다.
“그래도 똑같은 거죠. 김갑세(이경영 분)가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그 아버지 밑에서 그렇게 자란 것’이라고요. ‘그 사람’을 단죄하자는 목표를 두고 주안도 그렇게 키운거죠. 연기도 연기지만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대중들이 배수빈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진지함’이다. 널리 알려진 ‘주몽’, ‘천사의 유혹’에서도 그는 치밀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사실 저는 완전 허당이에요. 단막극을 통해 바보같은 연기도 많이 했는데, 많은 분들이 알지는 못하시더라고요. 한 번 긴 호흡의 영화 속에서 제 허당스러운 모습을 녹여내보고 싶기도 해요. 내년에 개봉되는 ‘마이 라띠마’에서도 굉장히 허점이 많은 인물로 나와요.”
배수빈은 대중들이 선호하는 자신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이미지에 갇혀 안주하지 않고, 점점 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제 이미지는 어떤 건지 잘 알고있어요. 저는 연기가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이미지 파괴는 상상력을 넓히고 많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죠. 배우로서 뭔들 못하겠어요. 오만가지 생각들을 제 눈 안에 담는 거죠. 그러고 나서 필요할 때 하나씩 꺼내는 거예요. ‘아, 저 사람은 연기가 좋아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느 이미지에 절 가둬두는 건 너무 싫거든요.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려운 작업이지만, 이제 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앞으로 더 재밌어질 것 같아요.”
진지한 눈빛 안에 커다란 포부를 지닌 배우였다. 아직 대중들에게 보여줄 것이 많다는 그가 향후 어떤 연기로 모두를 놀라게 할 지 기대가 모아진다.
양지원 이슈팀기자 / jwon04@ 사진 황지은 기자 hwangjieun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