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황유진ㆍ정태란 기자] “도매시장이 제일 북적일 때가 이 시간인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네요.”
지난 12일 새벽 5시. 서울 영등포 청과물 시장의 풍경은 적막하기만 하다. 가게마다 환하게 불을 켜고 있지만 시장을 찾는 손님은 찾아 보기 힘들다. 가게 주인들은 우두커니 앉아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지만 반가운 발걸음이 뜸해진지는 한참이다.
이 시장에서 9년째 남편과 함께 과일 도매상을 하고 있는 최영미(48ㆍ가명) 씨는 올 겨울이 유독 춥고 시리다. 얼음장같은 가게 안을 서성거리며 추위를 이겨보려해도 영하 10도의 날씨를 비닐 천막 하나가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밤 10시에 문을 열어 오전 10시는 돼야 문을 닫는 고된 일상이 이젠 익숙할 법도 하지만 장사가 안 되면 힘은 두배로 든다.
“4남매를 키우면서도 새벽일을 하느라 지난 9년 동안 애들 밥 한번 못챙겨 줬어요. 그것만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프고 속 상하죠. 그렇게 고생을 했으면 남는거라고 있어야 하는데….”

최 씨 부부의 지난 3달동안 적자는 무려 4000만원에 달한다. 대출도 받고 사채까지 끌어쓰며 버티고는 있지만 요즘같아선 언제까지 장사를 할 수 있을지 밤 잠이 안 올 정도다.
벌이도 시원찮은데 한파까지 일찍 찾아온 탓에 방한 비닐을 설치하느라 150만원이나 들었다. 그마저도 최 씨 부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과일이 얼어서 팔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 돼서다.
최 씨는 “150만원 짜리 방한 비닐 설치를 못한 옆 가게는 2주째 영업을 쉬고 있어요. 그나마 가게를 열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겨야죠”라며 애써 웃어보였다.
최 씨 부부는 장사가 안돼도 주말마다 전국 각지의 과수 농가에 방문해 과일을 떼온다. 다 팔리지 않은 과일이 있어도, 다 못팔 것 같은 걱정이 들어도 꾸역꾸역 과일을 사들이는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물건을 계속 사야지 농사꾼이 내년 농사를 짓지 않겠어요? 같이 잘 살아보자는 생각으로 빚을 내서라도 주기적으로 과일을 들여놓아아죠. 의리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최 씨가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다. 대형마트들이 과일 농가와 직거래를 하면서 단가를 높여놓는 바람에 최 씨같은 도매상들이 울며겨자먹기로 가격을 높이 쳐줘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와 오래 거래한 농가에서 대형마트가 돈을 더 준다며 같은 단가를 요구할 때는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시린 겨울을 보내는 사람들은 재래시장 상인들 뿐만이 아니다. 영세업종 종사자들 역시 “‘노느니 일한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며 입을 모은다.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인근에는 대표적인 영세업종 ‘이발소’가 유독 많다. 이발비는 단돈 3500원, 염색비는 5000원이다. 하지만 이발소마다 텅텅 비어있기 일쑤다.

9개월 전 이발소를 개업한 김한철(57ㆍ가명) 씨는 “저렴한 가격을 유지해야만 손님들이 오는데, 그 가격에 맞추려면 적자가 나는 걸 감수해야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하소연했다.
김 씨는 그나마 최근에는 적자가 줄어 다행이라고 했다. 개업하고 첫 두달은 적자만 600만~700만원이었는데 최근에는 한달 영업하면 200만원정도 손해를 본다.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던 이웃 이발소마저 운영비 감당을 못해 최근 직원을 한명 내보냈다. 김 씨는 개업한지 1년도 안된 이발소를 얼마나 더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김 씨는 “내 뼈를 깎아먹는 심정으로 하는거지 그렇지 않으면 영세업종은 다 문닫아야 한다. 고정적으로 나가는 비용을 다 제하고 나면 수입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쩌겠나. 돈벌려고 일하는게 아니라 봉사하는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막막한 현실을 전했다.
“내년 봄이 되면 나아지겠죠….”
최 씨와 김 씨는 그래도 희망을 잃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따뜻한 봄이오면 ‘적자 인생’에도 빛이 들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