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 붉은 길, 푸르른 마음 (56)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낭떠러지 깊이가 400미터에 이르는 절벽은 흔치 않다. 건물로 치자면 무려 130층이 넘어야 그 높이에 이르게 되는데, 그 누구라도 130층 옥상에서 아래를 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그런 높이의 절벽을 품고 있는 골프코스는 더더욱 흔치 않을 터인데… 현성애는 공교롭게도 그런 곳을 콕 짚어내고 있었다.

“하긴… 심장이 벌렁거릴 만도 하겠네요. 저는 아직 가보질 못해서 실감할 수 없지만, 티잉 그라운드가 엄청 높고 위험하다면서요?”

“사파리 리조트에 있는 레전드 골프장 말이야?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아름답기만 하더구먼. 좀 높긴 하지만 계곡을 타고 산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지.”

“위험하다던데요? 어떤 사람은 그 높이가 800미터가 넘는다고도 해요. 티샷하려면 헬리콥터를 타고 간다면서요?”

“맞아요, 빨간 헬리콥터를 타고 올라가요. 200불인가? 220불인가… 헬기 탑승료를 내야 올라갈 수 있었어. 하지만 홀인원을 하면 상금을 100만 불이나 받지.”

“헬리콥터가 뜨거나 내려앉을 땐 바람이 엄청 불지요? 영화에서 보면 옷자락이 심하게 펄럭이곤 하던데요?”

“아마 그럴 거야. 여자들은 몸 가누기도 힘들지.”

“그럼 딱이네.”

“뭐가?”

“마누라 떠밀어버리고 핑계대기에 딱이라고요.”

“그만 입 다물지 못하겠어?”

농담 반, 진담 반이었을까? 하지만 현성애는 진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란 듯 초롱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마누라 등을 떠밀 리도 없지만 그 사람과 레전드 골프코스에서 함께 라운드 하리란 보장도 없어. 그러니 헛 다리 긁지 말라고.”

“남아공까지 갔으면 그런 유명한 골프장에 한번쯤 들러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남아공에 유명한 골프장이 어디 한 두 갠 줄 알아? 에린베일, 아라벨라, 펄 밸리, 크로 밸리… 이름만 들어도 가슴 저릿해지는 곳이 수 십 개야.”

현성애는 끈질기게 레전드 골프장을 들먹였고 400미터 벼랑 위에서 티샷을 한다는 18번 홀의 위험성에 대해 집착했다. 유민 회장은 의도적으로 그녀의 말 화살을 피해갔다. 하지만 타깃을 정하고 날아드는 화살을 끝끝내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현성애가 쏘아대는 화살촉에는 푸르른 독이 묻어있질 않은가.

“사모님에게 이혼 당하면 안돼요. 이혼과 동시에 회장님 재산의 절반이 날아갈 테니까. 회장님은 귀족에서 서민으로 전락하게 되는 거예요.”

“서민? 웃기지 말아요. 그래도 절반의 재산이 남을 텐데?”

“거짓말이 심하시군요. 소송 이후에 털어 잡수신 돈이 얼마인 줄 다 알거든요? 레이싱 사업에 말아 드신 돈만해도… 어마어마하겠지요? 그 뿐인가요? 광산업자 흉내를 내는 여자사기꾼에게는 얼마나 날렸을까?”

“여자 사기꾼?”

“네, 예쁜 척하는 국제 사기꾼.”

예쁜 척 하는 국제사기꾼이라면 얼마 전에 헤어진 양은혜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듣고 보니 모두 맞는 말이었다. 현성애, 이 여자는 도대체 나에게 뭘 원하고 있는 것일까… 유민 회장은 쓴 입맛을 다실뿐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