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 구자경 명예회장의 미수연(米壽宴)에는 LG, LS, LIG, GS 등 범 LG가(家)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구 명예회장은 부친인 연암이 65년 전 개발한 ‘럭키크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출시를 앞뒀던 ‘럭키크림 더 클래식’을 손님들에게 선물했고 모두가 감명을 받았다. 창업회장의 ‘고객우선’ 경영 방침을 다시 한 번 가슴에 되새기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에서 구재서와 진양 하 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연암의 아명은 정득이다. 연암은 아호다. 연암은 조부 밑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4세가 되던 1920년 만석꾼인 김해 허 씨와 결혼했다.
유교 가정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히던 연암은 지수보통학교에서 3년간 초등교육을 받고 중앙 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한 뒤 귀향했다.
연암은 귀향과 함께 승산마을에서 소비협동조합 운동을 펼쳐 이미 상술에 능한 일본인의 잡화 판매에 대응했다. 일제의 침략정책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우리의 농토를 한창 집어삼키던 때였다. 협동조합에 몸담은 지 5년이 되던 1931년 연암은 사업전환을 모색했고 새로운 구상은 진주에서 포목상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진주는 발전성이 컸고 포목상은 일본 상인들과 경쟁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이 시기 연암은 이미 사농공상적 직업차별 의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구 씨 집안은 상업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어 처음엔 반대에 부딪쳤으나 결국 설득에 성공해 부친으로부터 2000원(圓)의 자금을 얻었고 1931년 7월 ‘구인회상점’의 문을 열게 됐다.
연암은 값을 깎아주지 않는 대신 포목의 자를 속이지 않고 신용을 쌓아갔다. 포목을 비수기에 싸게 사들였다가 성수기에 비싸게 되팔아 이윤을 올렸다. 연암이 소상인적 지주형 사업가에서 탈피해 근대적 기업가가 된 것은 8ㆍ15해방 이후 부산으로 이주하면서부터다. 서대신동에 자리를 잡고 무역업을 하는 조선흥업사를 설립한 연암은 흥아화학공업사 화장품 기사 김준환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1946년 2월 연암은 사돈인 만석꾼 허만정이 사업자금과 함께 그의 아들 허준구의 경영수업을 부탁하며 함께 화장품 판매업을 시작했고 이때 구 씨와 허 씨의 동업관계가 성립됐다.
화장품 판매업에 성공한 연암은 크림을 직접 생산키로 결심하고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 설립과 동시에 ‘럭키크림’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좋은 품질 덕분에 다른 회사 제품이 500원을 받을 때 럭키크림은 1000원이나 했지만 불티나게 팔려 3년 만에 3억원의 이윤을 올렸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크림통 뚜껑이 파손돼 반품 물량이 늘어났던 것이다. 방법을 찾던 연암은 플라스틱 뚜껑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본에서 플라스틱 정보를 습득했다. 부산 범일동에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했고 미국에 사출기를 주문해 1952년 플라스틱 빗을 생산했고 칫솔 등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해 큰 성공을 맛봤다. 1954년에는 연지동에 공장을 세워 비닐원단 및 플라스틱 제품 제조시설을 대폭 확장했고 1955년에는 럭키표 치약도 생산하며 현재 LG그룹의 기반을 한층 확고히 했다.
전자산업으로 사업방향 확장을 모색한 것은 1950년대 후반이었다. 1958년 연암은 금성사(현 LG전자)를 설립, 국내 최초 라디오를 생산했다.
1961년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하자 연암은 TV 수상기 제작에 돌입해 1966년 금성사는 국내 최초의 흑백TV(19인치)를 생산했다.
연암은 창업자로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다가 1969년 12월 31일 향년 62세로 별세했다. 회갑이 되던 해 연암도서관(현 진주시립연암도서관)을 건립해 진주시에 기증했고 별세하기 일주일 전에는 재단법인 연암문화재단(현 LG연암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 Oblige)를 실천했다.
<류정일 기자> /ryus@heraldm.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