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위기는 속도의 위기 유동성 막히면 순식간에 전이 그리스 부도는 시작에 불과 인간중심의 새 패러다임 필요

현대는 속도의 시대다. 시간이 곧 돈이라고 생각하는 서양에서 근대 자본주의 역시 속도와 함께 탄생했고 현대까지 그 속도는 가속화됐다. 시간이 돈이라는 서양의 관념은 자본의 축적이 속도에 비례해 증가한다는 등식도 형성시켰다. 말하자면 돈이란 유통되는 속도에 비례해 축적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유럽에서 지폐의 발명 내지 유통은 돈의 유통 속도를 본격적으로 가속화시켜 자본의 축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7세기 말 영국 은행에서, 뒤이어 스코틀랜드의 존 로가 1716년 파리에 설립한 은행에서 실행됐다.

비록 그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를 통해 마침내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그때부터 갇혀 있던 새로운 형태의 돈은 무서운 속도로 세상으로 튀어나왔다. 문제는 그 속도와 움직임이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돈의 흐름과 속도를 개인은 물론이고 정부 역시 예측하고 조절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유통 속도를 증가시켜야 하지만 그 속도가 증가할수록 자본은 우리의 수중을 벗어난다는 일종의 역설이 시작된 것이다.

지폐를 출현시킨 근대의 이런 특성을 독일의 문호 괴테는 ‘악마적 속도의 시대’라 했다. 그의 희곡 ‘파우스트’ 2부에는 악마 메피스토가 지폐를 만들어 궁정의 재정 파산을 일시적으로 모면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물론 궁정의 빚을 지폐를 남발해 메우려는 일종의 사기였지만 겉으로는 일시에 국가의 재정이 건전해지고 정부는 파국을 향해 다시 흥청망청 돈을 쓰게 된다.

요즘 회자되는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위기도 자본의 이런 속도의 위기가 아닐까? 현재는 자본의 양과 종류가 월가 파생상품처럼 늘어나고 그 속도는 세계의 모든 곳을 순식간에 망라할 정도로 증가했다. 때문에 자본의 통제는 거의 불가능해져 지구촌 어느 곳에서라도 유동성의 문제가 발생하면 자본의 흐름은 순식간에 지체되고 그 영향이 세계 전역으로 파급되는 위험이 상존하게 됐다.

최근 그리스의 부도 위기 및 스페인의 재정 위기도 유로존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자본주의의 전반에 상존하는 위기를 보여주는 전형적 예라 할 수 있다. 그 해법으로 긴축 정책을 견지하는 독일과 돈을 풀어야 한다는 프랑스 등의 의견이 대립된다고 보도된다. 이것 역시 자본의 흐름 및 속도의 조절 문제와 직결된다.

현재로선 어떤 선택이 정답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자본의 흐름은 이미 자체적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의 위기가 현대 자본주의 위기의 단면이고,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가 자본의 속도와 그에 대한 적절한 통제의 부재라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본래적 역설의 결과라면 그리스 부도는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판도라 상자가 이미 열렸다면, 우리는 그 상자를 인간에게 유익하게 만들고자 시도해야 한다. 비록 마지막에야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할지언정 지금부터라도 자본주의의 기본적 패러다임을 속도와 축적이 아닌 인간적 뿌리에서 재검토해 보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