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7회> 바람 부는 길 25
“날 어쩔 셈입니까? 나는 거성그룹 레이싱팀의 드라이버일 뿐입니다. 중요한 사업정보나 자동차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먹통인 사람입니다.”
권도일은 속삭이듯 이렇게 항변했다. 세상에… 그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사업상 이뤄지는 일상적인 대화 모습일 뿐, 납치하거나 납치당하는 긴박한 광경으로 보일 리가 없었다. 권도일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 서 있는 그들은 저마다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표정에는 살기가 흘렀다. 권도일이 고함을 지르거나 발악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에 달려 있소.”
“대역까지 써가면서 나를 납치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임스 리 박사를 만나면 알게 될 겁니다.”
권도일이 프로포플의 수면 효과에서 완전히 깨어났음을 확인하자 그들은 활동을 개시했다. 언뜻 유흥주점의 내부 밀실인 것처럼 보였던 그 낯선 공간은 이제야 유심히 살펴보니 컨테이너박스를 개조한 간이 아지트였다.
“지금이 새벽 3시20분입니다. 길엔 아무도 없어요. 게다가 여긴 베들레헴 언덕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요.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속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이를테면… 곧 밖으로 나갈 텐데, 고함을 지르거나 엉뚱한 짓을 하다가는 큰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충고를 하는 중입니다.”
“알겠소. 매우 친절하시군요.”
“당신이 조용히 따라주기만 하면 우린 언제나 친절합니다.”
“고맙소.”
권도일은 그런 식으로 조용히 끌려갔다. 컨테이너박스를 벗어나자 그들이 말한 대로 길거리는 암흑천지였다. 네온사인은 고사하고 제대로 불을 밝힌 간판 한 개도 없는 그런 허허벌판이 이어졌다.
“이리로 옮겨 타라. 좌석 뒤에 반듯하게 누워서 팔을 걷어!”
“또 주사를 맞습니까? 다시 잠재우려고….”
야채를 가득 실은 트럭이 다가왔고 권도일은 트럭운전석으로 끌려 올라갔다. 운전석 뒤에는 한 사람이 길게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운전자의 목소리가 매우 거칠다는 사실까지만 그는 기억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한동안 적막 속을 헤매었을 뿐.
“굿모닝!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여전히 낯선 곳에 누워 있는 중이었고 낯선 사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은편 벽 위로 줄지어 매달린 환풍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그 틈으로 밝은 빛이 밀려 들어왔기 때문에 사내의 모습이 실루엣으로만 드러날 뿐, 얼굴 모습을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말 발음이 정확한 걸 보니 한국 사람이군요. 여기가 어딥니까?”
“더 이상 자동차가 개발되기를 원치 않는 단체… N-DOS 사령부요.”
“좌표는 어떻게 됩니까?”
“위치는 대충 시리아 동북쪽! 우리의 활동 목적은 지금처럼 석유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 시대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거요. 행동목표는… 신개념 자동차를 개발하는 전 세계의 과학기술자들을 은밀히 제거하는 것!”
권도일은 드디어 사지로 끌려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이들은 전 세계에 석유를 팔아 부를 누리고 있는 아랍 석유카르텔의 하수인들임에 분명할 것이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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