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 끝까지, 죽을 때까지 (47)
글 채 희 문 | 그림 유현숙
신희영과 강준호가 몬테카를로의 불야성을 향해 콜택시를 타고 사라지자 변두리 호텔에 남아있게 된 사람은 강유리와 매니저 백광돌, 그리고 유한솜 뿐이었다. 그들은 문득 쓸쓸함에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유한솜은 마치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입을 봉한 채 두문불출, 호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었다. 타이거 우즈의 곁을 맴돌던 잠시 동안을 제외하고는 늘 그런 상태였으니 어쩌면 이미 우울증의 중기를 넘어선 단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분위기가 영 어색하군, 날씨도 춥고, 냉기는 뼛속까지 스며드는데 한솜 양의 표정까지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으니 미치겠어. 왜 저러지?”
“모르지요. 내 동생 같았으면 벌써 몇 대 쥐어박았을 거예요. 명색이 오너 딸이니 그럴 수도 없고…”
“누구에게 실연을 당했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요즘 들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거든요? 어쩌면 이제 막 누굴 좋아하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죠. 좋아하면서도 아직 고백은 못한 단계! 소녀들은 그럴 때 저런 반응을 보이거든요?”
“반응? 고독을 씹는 거?”
“그러게요. 우리까지 도매금으로 고독을 씹게 되는 군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와서도 여전히 고독을 씹고 있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몬테카를로 시내로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할까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 장차 LPGA를 주름잡으면서 타이거 우즈와 동업할 사람을 변두리 호텔 구석방에 처박아 두는 것도 실례지.”
“동업? 타이거 우즈와?”
“동업이 별건가? 같은 짓 하면서 돈 벌면 그게 동업이지.”
대부분의 경우 결단의 시기에 이르러서 먼저 칼을 뽑는 쪽은 여자인 경우가 많다. 지금도 먼저 칼을 뽑은 사람은 강유리였다. 그녀는 더 이상 썰렁한 분위기 속에 머물러 있기는 싫다는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타이거 우즈를 만난 이후로 그녀의 가슴 속엔 어느새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있었으니 나이트클럽이나 댄스홀에 가서 살랑살랑 몸이라도 풀어야 하리란 생각이었다.
백광돌은 이게 웬 떡이냐 싶었지만 겉으로는 제법 근엄한 척 시치미를 떼었다. 고기도 먹어 본 자가 그 맛을 안다고, 얼마 전 하와이에서 슬쩍 그녀를 안아 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헛헛함 속에 살아왔던가. 스마트하면서도 한편으론 정숙하기 그지없던 그녀… 하지만 와락 품에 안았을 때 얼마나 뜨겁게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던가. 원래 골프선수들에겐 그런 양면성이 숨어 있는 것일까? 겉으론 냉정하게 거리를 재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스윙을 하지만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는 LPGA 선수들… 그런 야성을 강유리 역시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갑시다. 유럽에서 제일 크다는 몬테카를로 카지노에 가서 유로를 한 보따리 따가지고 오든, 모나코 항구 옆 300미터 높이에 둥둥 떠있다는 고공식당에서 밥을 먹든, 밤바다에 빠져 죽든… 하여간 나갑시다.”
“그래요, 우리 둘이서만 나가요. 모나코 해변 어딘가에 테니스 선수 ‘나달’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던데 거길 갈까요? 아니면 ‘르 생 브노’에서 유명한 피자를 먹고 카지노 광장까지 산보를 할까요? 아니면… 바페토 할아버지와 딸이 함께 요리한다는 ‘바페토 2’를 찾아가볼까요?”
“오, 유식해! 모나코 식당을 많이 아는군.”
“어서 가요. 와인이라도 마시면서 샹송을 듣자고요. ‘이브 몽땅’의 고엽, ‘에디트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 ‘밀바’가 부른 눈물 속에 피는 꽃,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 그런 노래들을 모두 듣고 싶어요.”
순간 백광돌은 머릿속이 혼란해져 왔다. 대충 술 먹이고 꼬여서 품에 안아보려 했던 그녀에게서 불현듯 지적인 면모를 느끼게 된 까닭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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