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인정사정 볼 것 없다 (39)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그레이스 켈리… 참 멋진 여배우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배우가 은막을 주름잡고 있을 때에 오장님께서는 아직 이빨도 나지 않았을 때인데…”
오장님? 그야말로 기막힌 호칭이었다. 원래 재벌 2세의 공식 직급은 전무였다. 그러나 전무에도 급수가 있는 법. 장차 거성 자동차그룹을 통째로 차지하게 될 성골에게 전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무이긴 하지만 웬만한 사장보다 끗발이 높은 전무… 그러니 사장보다 한 끗 높여서 오장이라 부르곤 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 여배우를 알고 있냐고요? 이미지… 고고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사진 한 장의 이미지만으로도 그 여자를 충분히 사모할 수 있는 것이지요.”
재벌 2세는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하긴 맞는 말이었다.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모나코의 대공 ‘레니에 3세’와 결혼하여 모나코 공비(公妃)가 된 왕년의 미녀 배우 ‘그레이스 켈리’는 사실 그의 머릿속에 불변의 아름다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의 말뚝도 예쁘게 보인다고, 그레이스 켈리를 사모하고 있으니 그녀의 딸 ‘스테파니’ 공주와 ‘캐롤라인’ 공주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벌렁! 그러다보니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 ‘모나코’란 이름만 들어도 명치끝이 아련해질 지경이었다는 말이다.
“아! 이미지. 그렇다면… 이번 몬테카를로 랠리에 참가하는 우리 거성그룹도 현지에 확실한 이미지를 심고 오도록 해야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역시 도 상무님과는 말이 통해서 좋아요. 이번에 몬테카를로 랠리를 뛰고자 하는 첫째 이유가 이미지 확립입니다. 그래야 내년에 치르게 될 본 게임, 5개국 관통 랠리에서 세계의 주목을 끌 수 있다는 결론이지요.”
재벌 2세는 손수 원두커피를 갈고, 드립하며 조근조근 속내를 밝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재벌 2세가 손수 만들어준 커피 마셔본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도종호 상무는 이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최소한 3등 안에는 들어야 이미지가 확립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권도일 선수의 고삐를 바짝 죄어야 하겠군요. 그 랠리가 어찌나 험한지… 결승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30퍼센트는 깨지고 뒤집어져서 중도탈락을 하지 않습니까? 참가하는 머신들도 죄다 고급이지요. 작년에만 해도 시트로엥 C4, 포드 포커스, 스바루 임프레자, 푸조 207 S2000, 스즈키 SX4 등이 두각을 나타냈는데… 우리는 고작 출고한지 30년이 넘은 치타를 수선해서 끌고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도종호 상무는 벌써부터 연막을 피우고 있었다. 3등 안에 들기란 바늘로 코끼리 잡는 것보다 어려운 실정이라고 미리 엄살을 부려놓아야 후환이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입상하지 못한다는 것쯤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만 살려보자는 말입니다.”
“뾰족한 묘안이라도 있을까요?”
“디자인! 오로지 디자인입니다. 남들은… 머신이라고 하던가요? 출전 차량에 현란한 색칠을 하고 스폰서 광고를 온통 도배해 놓지만 우린 역발상으로 대응하는 겁니다. 불에 타서 검게 그을은 차에 그레이스 켈리의 얼굴만 그려 넣자고요.”
“아! 모나코에서 치러지는 경기에… 모나코 왕비의 얼굴을 그린 채로 달리자는 말씀이지요? 그거… 죽이는 발상이군요.”
“죽이지요. 비밀리에 참가하는 것이라 스폰서도 없고, 당연히 광고딱지도 붙이지 못할 텐데… 그럴 바에야 감성이미지로 승부하자는 겁니다. 눈 감고 생각해 보세요. 시커멓게 그을은 차에 왕비의 얼굴을 그리고 달리는 모습을. 만에 하나 그런 모습으로 상위권에 입상이라도 해준다면 우리는 모나코의 영웅이 되겠지요.”
“아! 정말로 죽이는 발상입니다, 오장님.”
“헬멧과 레이싱 슈트에도 그레이스 켈리의 이목구비를 조각내어 디자인하세요. 그리고 팀 이름도 ‘그레이스’로 명명하세요. 그렇게 밀고 나가봅시다.”
햇빛에 드러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바라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가? 재벌 2세는 색 바랜 1974년 산 중고차를 몰고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신화를 창조하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