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인정사정 볼 것 없다 (15)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언젠가 한번쯤 언급한 기억이 있지만… 가끔 새벽골프를 치다보면 편편해야 할 그린 위에 요염한 엉덩이 자국이 찍혀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럴 경우엔 눈을 가늘게 뜨고 엉덩이 자국의 4시 방향, 혹은 8시 방향을 주시해야 한다. 이른 바 ‘니(Knee) 브레이크’를 찾아내야만 한다는 뜻이다.
“펑퍼짐 한 엉덩이 자국 옆에는 꼭 남자 놈의 무릎 자국이 찍혀있게 마련이란 말예요. 엉덩이 자국에 현혹되다 보면 무르팍 자국을 간과하기 십상이지요. 엉덩이로 지그시 눌러준 잔디는 결이 꺾이지 않아서 볼의 진행을 심하게 방해하지 않아요. 그러나…”
분탕질을 하기 위해 앉았다, 숙였다, 일어났다, 굽혔다를 반복한 무릎 자국에는 잔디의 결이 꺾여서 볼의 흐름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 강준호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말예요, 넓은 엉덩이 자국에 신경 쓰다가 심각한 무릎 자국은 놓치기 십상이거든? 그러다가 한 타를 잃는단 말이지. 참 기막히고도 슬픈 일이에요.”
“설마… 그린 위에서 누가 그 짓을 하겠어요?”
“어허! 설마라니? 그린 위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 짓인들 안 하겠어요? 바람 시원해 좋고, 잔디 푹신 거려서 좋고…”
“하긴… 싱크대나 식탁 위에서도 하는데 그린 위에선들 안 할라고?”
“싱크대? 식탁?”
“난 아니에요. 영화에서 보면 그렇다는 거지요. 왜, 있잖아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라고… 이마 톡 튀어나온 배우 ‘잭 니콜슨’과 ‘제시카 랭’이 부엌에 있는 밀가루 반죽 대 위에서 달리는 장면이 떠올랐을 뿐이라고요.”
“그래요. 나도 봤지. 헌데 줄거리는 다 까먹고 오로지 그 장면만 떠오르네요. 그런걸 보면 섹스에 대한 기억은 모든 걸 초월하나 봐.”
“환상을 채워줄 수 있는 상대일 경우에 한해서겠지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남자들이 더 잘 알잖아요? 제 마누라들과 자는 건 의무방어라면서요?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자면서 그 행위가 기억에나 남겠어요?”
신희영은 문득 서울에 남아있을 남편 유민 회장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른다 싶었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여겨졌다.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도록 부추길 필요도 있으리라. 지긋지긋한 유민 회장과의 결혼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접어버리도록 유도하는 것도 이번 하와이 여행목적 중의 하나 아니었던가?
“여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섹스하면서 눈 감고 현빈이나 조인성을 생각한다던데… 신 여사님은 그렇지 않아요? 한참 뛰다가 눈 떴을 때, 남편 대머리가 보이면 손바닥으로 갈겨버리고 싶은 생각 안 나요?”
“나지요. 언젠간 파리채로 찰싹 후려치고 싶을 때도 있었지요… 호호호.”
“흐흐흐… 그렇지요?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남편 생각은 아예 내다 버리세요. 우리가 앞으로 산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겠습니까?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게 나날을 보내자고요.”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는지, 강준호는 그녀를 조용히 안아 일으켰다. 그녀도 순순히 몸을 의지한 채 모래밭을 차고 일어섰다. 그녀를 한동안 꼬옥 끌어안고 있으려니 가슴 속에서 펄떡이는 심장의 고동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신 여사님, 남편과 이혼하세요. 남은여생을 나와 함께 살아갑시다.”
강준호는 마음을 다잡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이번 여행을 떠나온 이후 벌써 두 번째 내지르는 필살기였다. 그러나 일부러 그런 것인지 혹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인지… 마침 하얀 포말과 함께 바닷물이 철썩 밀려와 발목을 적시자, 대답은커녕 그녀는 깜짝 놀라며 옆 걸음질 치기에만 바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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