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인정사정 볼 것 없다 (16)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아버지 권일주의 병원을 찾아 온 것이 과연 얼마 만이던가? 권도일 전무는 작년 여름, 베트남 내해에서 벌어졌던 활극을 떠올리며 깊게 심호흡을 한 뒤에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공연히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사내 녀석이 한 번 마음을 품었으면 그것부터 해결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의 아버지 권일주는 작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남산만이나 한 크루즈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파라솔 끝자락으로 가슴을 맞고 넝마처럼 훨훨 날아 검은 바닷물 속으로 추락한 지도 벌써 한 해가 지났건만…
“아버님, 이제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유민이는 곧 파산에 이르게 될 것이고 그놈 가정도 풍비박산이 날 거예요.”
“잘 했다.”
“유민의 아들… 잘 아시죠? 유호성이라고. 그 놈과는 곧 레이싱 대결을 벌일 예정입니다. 어쩌면 레이스 도중에 그놈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어요.”
“죽일 때 죽이더라도 요령껏 해야 한다. 네가 법의 심판을 받는 우를 범해서는 안 돼. 그런 꼴을 당하는 건 나 혼자로 끝내야지.”
“미련한 짓은 절대 안 합니다. 심리전으로 죽이는 거지요. 최소한 아버님이 당한 것처럼 반신불수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잘 했다.”
“그 모든 일에 현성애와 힘을 합하고 있습니다. 기억나시죠? 예전에 아버님께서 경영하시던 블루 아우토의 여 비서.”
“기억나지. 그 아가씨가 널 도울 줄 알고 있었다. 둘이 완벽하게 힘을 합쳐서 철저히 복수해다오.”
권일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높은 크루즈 선에서 떨어져 수면을 뚫고 물에 빠져들 때의 충격으로 허리가 골절된 이후 휠체어에 의존해오던 그였다. 몸의 신경 줄은 반토막 났지만 오히려 유민 회장에 대한 복수심은 두 배로 늘어난 셈이었다.
“주사바늘만 갈아주고…”
권일주는 메마른 팔뚝에 꽂혀있는 주사바늘을 가리키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주사바늘을 통해서는 골다공증이 진행되는 등뼈로 칼슘과 비타민 D가 혼합된 백색 약액이 주입되는 중이었다. 이 병원에 입원한 지 거의 1년 만에야 겨우 이중 에너지 방사선 측정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가 양호하여 퇴원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스스로 주사바늘 갈기… 이를테면 장차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기 위한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됐다. 가라.”
권일주는 신주단지처럼 언제나 머리맡에 보관하던 자동차 경주용 슈트를 권도일에게 전해주었다. 찬란한 금색 띠 세 줄이 가로 그어진 자동차 경주 유니폼! 만일의 화재에 대비해 불에 타지 않는 특수소재 노멕스(Nomex)로 제작된 두툼한 옷이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아버님.”
권도일은 울컥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아내며 대답했다. 유호성과 대결하는 레이싱 도중에 차가 뒤집어져 불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굴하지 말고 달려서 끝장을 보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슈트를 전해주는 권일주의 팔뚝은 장작개비와도 같이 메말랐지만, 푸른 노끈처럼 드러난 핏줄 주위에는 아직도 쭈글쭈글한 화상 흉터가 남아있었다. 악랄한 기업사냥꾼 유민 회장에게 대항하다가 얻은 영광의 흉터였다.
“유민… 그 놈이 피를 물고 쓰러지는 날, 내가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게 될 거야. 그날까지는 네가 나서서 본때를 보이려무나.”
병실 문을 나서는 그의 귓가에 병들고 불구가 된 노인의 목소리가 묻어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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