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날개에 숨긴 칼 (28) 글 채희문 /그림 유현숙 동쪽이 어디일까? 물론 저만치 멀리 검푸른 색을 띠고 엎드려 있는 육지방향이 동쪽일 것이다. 착지할 방향을 찾아내었다면 이내 속도전으로 돌입해야 할 터. 만약에 유호성이나 김지선의 눈에 뜨이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뼈도 못 추릴 판이었다.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영화 007의 재미는 호흡곤란을 초래하는 스릴과 서스펜스일 것이다.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산길을 내달리고 물길을 가르는 본드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매력 덩어리 아닌가. 그러나 그건 영화일 뿐이고… 정말로 손바닥, 발바닥에 땀나도록 달려야 할 경우는 우리 일상에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남의 물건을 슬쩍하다 들킨 도둑놈의 경우, 여탕을 훔쳐보다 들킨 까까머리 사내 녀석의 경우, 설사가 나오려는 조짐을 간파한 도덕선생님의 경우를 제외하곤 굳이 손바닥에 땀이 차도록 달릴 경우는 없겠으나, 단 하나 질투에 눈이 멀었을 경우엔 누구를 막론하고 악에 바칠 수 있다는 결론이다. 현성애 역시 질투에 눈이 멀어 악에 바쳤으니…

제임스 본드처럼 산길을 굴러 내려와 구두를 벗어 든 손에 땀이 차도록 동쪽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조막만한 섬에도 해변이 펼쳐져 있었으며 소금처럼 하얀 모래로 덮인 백사장이 제법 펼쳐져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에 차오르고 발바닥이 뜨끈 거릴 지경에야 그녀는 자그마한 술통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어쭈, 요것들 봐라… 하악, 하악!’

술통 안을 들여다보니 요지경 속이었다. 곱게 벗어서 개어놓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비롯하여 김지선의 원피스, 모자, 선글라스, 핸드백 등등이 놓여 있었고, 그 옆으로 대충 벗어놓은 유호성의 바지와 속옷 나부랭이가 구겨진 채로 들어 있었다. 백화점 로고가 찍힌 비닐봉투를 풀어내자 그 속에서 샌드위치, 생수, 겁라면, 캔커피, 소주, 통조림, 담배, 도너츠, 과일, 마른안주, 물티슈 등등, 심지어 빅토리녹스 다목적 칼에 훼스탈, 정로환 까지… 2박 3일간 먹고 즐기고, 사랑하고, 배설하는 데 필요한 모든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주 신접살림을 차렸네.’

이럴 땐 누구라도 혼잣말을 지껄이게 마련인 법이다. 어느 정도 숨을 가다듬은 그녀는 유호성의 속옷을 끄집어내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하고, 김지선의 브래지어를 끄집어내서는 상표를 뒤집어 까서 브랜드를 확인해보기도 했다.

‘캘빈 클라인? 꼴에 브래지어도 물 건너 온 것만 걸친단 말이지? 얼렐레? 팬티도 프랑스 제 발렌시아가를 입어?’

눈이 뒤집히면 무슨 짓인들 못할까? 그녀는 빅토리녹스 칼을 꺼내어 김지선의 팬티와 브래지어를 능지처참하기 시작했다. 반역 죄인을 잡아 육시를 하듯 팬티와 브래지어를 각각 여섯 토막으로 찢어낸 뒤에야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무슨 조화 속인지.

‘어디 보자… 모래 속에는 뭐가 숨겨져 있을까?’

질투에 눈이 멀긴 했어도 숨겨놓은 지갑과 핸드백은 잘도 찾아낼 수 있었다. 술통 바로 아래 색깔이 다른 모래를 파헤치니 아니나 다를까? 유호성의 장지갑과 김지선의 핸드백이 살포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장지갑은 60만원을 호가하는 페라가모였고, 핸드백은 차마 값을 논하기 어려운 벨기에 산 앤드뭴미스터였으니….

‘돈은 압수하고… 너희들을 곤장 10대와 더불어 물고문 형에 처하노라!’

그녀는 돈을 추려내고, 지갑과 핸드백을 돌멩이로 열 번씩 두들긴 후에 바닷물에 슬쩍 담갔다가 다시 모래밭에 묻어버렸다. 그렇게 분풀이를 해대고 나서야 그녀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직 유호성과 김지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좋겠지. 홀랑 벗은 채로 낙원을 뒹구니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야. 하지만…’

현성애는 이를 악물었다. 목표했던 대로 김지선의 원피스와 유호성의 옷가지 모두를 돌에 싸매어 멀리 바다 속으로 던져버렸다. 이미 능지처참을 당한 브래지어와 팬티도 조약돌에 감아서 수평선을 향해 힘껏 날려 보내고, 술통 속의 음식과 물건을 모두 바다에 쓸어 넣고 나니… 아 아! 감개무량! 뱃속으로부터 희열에 가득 찬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사를 감행한 현성애는 온 길을 다시 되돌아 달려갔다. 모터보트 아저씨와 약속한 시간이 얼추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신이 나서인지 아무리 달려도 힘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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