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사칭부터 부업 미끼까지, 피해자 3명의 그날
경찰, 3년 추적 끝 1137명 피해금 환급
이달부터 가상자산 거래소도 피해금 환급 절차
[헤럴드경제=김도윤·정주원 기자] “김소윤 씨죠.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입니다.”
‘또 보이스피싱은 아닐까.’ 지난 8월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김소윤(가명·28) 씨는 받지 않았다. 한 번 보이스피싱을 당한 뒤로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게 습관이 됐다. 계속 걸려오는 전화에 이상함을 느낀 김씨는 통화 버튼을 누른 후 뜻밖의 희소식을 접했다. 경찰이 그가 잃어버린 4000만원 중 2500만원을 되찾아줬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광역수사대는 3년에 걸쳐 김씨와 같은 보이스피싱 피해자 1137명을 찾아 가상자산 거래소에 묶여 있던 피해금 약 263억7000만원을 돌려줬다. 피해금을 돌려주겠다는 경찰의 전화마저 의심하게 된 김씨도 한때는 “나는 보이스피싱에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 단 몇 시간 만에 4000만원의 빚을 떠안았다.
헤럴드경제는 보이스피싱으로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8억원을 잃은 피해자 3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공포와 신뢰를 번갈아 자극해 판단할 틈을 빼앗고 주변과의 연락을 끊게 한 뒤, 일단 돈을 보내면 이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심리를 파고들어 피해를 키웠다.
“피해자인 것 같으니 도와주겠다”, 순식간에 무너진 경계심
“처음 전화를 받고 돈을 송금하기까지 4시간이 걸렸어요. 당시에는 뭔가에 홀린 듯 모든 일이 후루룩 진행됐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해요.”
지난해 6월 목포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김씨는 야간근무를 앞두고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 남성은 자신을 검찰청 사무관이라고 소개하며 김씨 명의 대포통장이 범죄에 이용됐다고 했다.
몇 분 뒤 검사를 사칭한 남성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처음에는 범죄에 연루됐다며 몰아세우다 김씨가 결백을 호소하자 “피해자인 것 같으니 도와주겠다”며 태도를 바꿨다. 이들이 알려준 가짜 검찰 사이트에는 김씨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사건 내용까지 떠 있었다.
일당은 범죄 연루 여부를 확인하려면 자산 검증이 필요하다며 대출을 받도록 했다. 대출금은 국가가 관리하는 ‘안전계좌’에 보관했다가 수사가 끝나면 돌려준다고 속였다.
김씨가 아동병원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육아 이야기를 꺼내 친밀감을 쌓는 한편 외부 연락은 통제했다. 새 휴대전화를 개통하게 하고 남자친구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내용까지 캡처해 보내도록 했다.
김씨가 뒤늦게 사기임을 깨달았을 때 4000만원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그는 이후 1년 넘게 초과근무와 야간근무를 병행하며 빚을 갚았다.
박요셉(가명·70) 씨도 지난해 5월 경찰과 금융감독원 직원, 검사로 역할을 나눈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속았다. 서로 다른 기관을 사칭한 이들이 번갈아 전화를 걸면서 박씨는 실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게 됐다.
이들은 “명의 계좌로 수십억원의 범죄자금이 오갔다”며 구속될 수 있다고 겁을 준 뒤 혐의를 벗으려면 ‘공탁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가족에게 알리면 가족도 공범이 될 수 있다”는 말에 아내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박씨는 결국 아파트까지 담보로 잡고 연 14% 수준의 고금리 대출을 받았고 추가 송금까지 하면서 피해액은 8억5000만원으로 불어났다. 그는 “8억원이 넘는 돈을 빌려 갚는 데만 1년을 꼬박 보냈다”며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상태로 살았다”고 말했다.
경찰의 추적으로 4300만원을 되찾았지만 피해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박씨는 보이스피싱 피해 이후 우울감이 커지는 등 여전히 당시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대구에서 학원강사로 일하던 김정숙(가명·49) 씨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부업을 빙자한 일당은 카카오톡 친구 추가와 동영상 시청만으로 실제 소액 수익금을 주며 신뢰를 얻은 뒤 “미션을 잘못해 돈이 묶였다”며 추가 입금을 요구했다. 단체대화방의 ‘팀원’들도 “나도 대출까지 받아 해결했다”며 김씨를 안심시켰다.
앞선 두 사람에게는 범죄에 연루됐다는 공포를 이용했다면 김씨에게는 이미 넣은 돈을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파고들었다. 돈을 되찾으려 추가 송금을 거듭하면서 피해액은 약 3000만원으로 불어났다. 김씨역시 경찰의 노력으로 1600만원을 회복했지만 여전히 빚을 갚기 위해 학원 아르바이트와 쿠팡 물류센터 일까지 병행하고 있다.
경찰관계자는 “경찰은 계속 사건을 보다 보니 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막상 전화를 받으면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다”며 “뉴스에서 수법을 많이 접했더라도 당사자가 되면 피해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보이스피싱은 2만3360건 발생해 피해액이 1조2578억원에 달했다. 특히 피해금을 빼돌리는 방식은 대면편취에서 계좌이체로 옮겨가는 추세다. 지난해 계좌이체 방식은 1만2636건으로 전체의 54%를 차지해 대면편취(6365건·27%)의 약 두 배였다. 올해 1~8월에도 계좌이체가 4937건으로 전체의 58%를 차지했다.
가상자산 계정 1050개 뒤져 피해자 1137명 찾았다
그렇게 1년여가 흘렀다. 잃어버린 돈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희미해질 무렵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김씨뿐만 아니었다.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잃고 각자의 삶에서 피해를 감당하던 이들에게 하나둘 같은 연락이 닿았다. 김소윤 씨는 2500만원, 박요셉 씨는 4300만원, 김정숙 씨는 1600만원을 각각 돌려받았다.
전자지갑·거래소 계정 1050개와 은행 계좌 16만3000개. 경찰은 2023년 9월부터 국내 주요 가상자산 거래소들과 협업해 ‘피해금 찾아주기’에 나섰다. 그렇게 가상자산 거래소에 묶여 있던 보이스피싱 피해금 약 263억7000만원이 다시 주인에게 돌아갔다.
보이스피싱 피해금 일부는 여러 은행 계좌를 거쳐 가상자산 거래소로 흘러 들어갔다. 거래소들은 피해금 유입 사실을 확인하면 해당 계정을 동결해 왔다.
하지만 돈은 묶었지만 누구에게 돌려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 통신사기피해환급법상 피해구제 절차가 적용되는 금융회사 등에 가상자산 거래소는 포함되지 않아서다. 은행은 거래소에 해당 계좌로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들어갔다는 사실까지만 알릴 수 있었고 피해자 정보는 공유할 수 없었다.
경찰은 먼저 거래소 계정과 연결된 실명 은행 계좌를 확인했다. 이후 영장을 발부받아 직전 계좌를 찾고, 다시 그 계좌의 앞선 계좌를 찾는 식으로 자금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다. 범죄조직이 여러 계좌로 돈을 옮기거나 쪼개 놓은 경우 같은 작업을 반복해야 했다.
경찰은 추적 끝에 돈이 처음 출발한 계좌를 찾아낸 후엔 다음 절차로과거 보이스피싱 신고 기록과 피해자가 제출한 송금 내역을 대조해 실제 피해자인지를 확인했다.
피해자를 찾고도 끝난 건 아니다. 당시에는 거래소에 묶인 돈을 곧바로 환급할 법적 절차가 없어 가상자산 계정 명의자의 처분 동의서까지 받아야 했다. 명의자가 연락을 받지 않거나 교도소에 갇혀 있거나 해외에 있는 경우도 있어 이들을 일일이 찾아야 했다.
과거 신고 내용과 송금 내역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어도 경찰의 연락마저 보이스피싱으로 의심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해야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경찰 관계자는 “관련된 사람이 워낙 많아 담당팀에서 일일이 찾아 만나고 연락해야 했다”며 “검거 실적이 올라가는 일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꼭 책임지고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계속 진행했다”고 말했다.
오는 10월부터는 그동안 피해금 환급을 어렵게 했던 제도적 사각지대도 상당 부분 해소될 전망이다. 개정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이 시행되면서 가상자산 거래소도 법상 ‘금융회사등’에 포함된다. 피해금이 거래소로 넘어가더라도 피해자 정보를 공유하고 계정을 지급정지한 뒤 환급할 수 있게 된다. 피해금이 이미 가상자산으로 바뀐 경우에도 환급 대상에 포함된다.
다만 피해금이 국내 거래소를 거쳐 개인지갑이나 해외 거래소로 빠져나가면 추적과 환급은 여전히 어려워 예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찰관계자는 “해외 거래소까지 가버리면 사실상 구제가 굉장히 어렵다”며 “피해자가 직접 가상자산을 구매해 다른 지갑으로 전송하면 피해 보상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법이 개정돼 신고만 빨리하면 피해 복구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라면서도 “국가기관에서는 돈을 보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돈을 보냈다면 최대한 빨리 신고해 지급정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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