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개그맨 이경규가 또 해냈다. 이번엔 낚시대만 잡고 있었을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시청률 1위의 주인공이 됐다. ‘예능인의 단두대’로 불리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MBC)을 통해서다.

이경규는 지난달 26일 방송 최초로 ‘누워만 있다가’ 시청률 1위에 오르더니, 2일 방송에선 ‘낚시만 하다가’ 또 다시 1위에 올랐다. “낚시만 하는 데도 웃긴 개그맨은 처음이다”, “누워만 있는데도 웃긴 개그맨은 처음이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연예계 대표 ‘낚시광’인 이경규는 이날 방송에서 충청도의 한 저수지를 찾았다. 인터넷 방송답게 네티즌들과의 친근한 소통을 위해 이경규는 허물없이 인사를 건넸다. “안뇽, 경규예요!” 그러더니 “세 시간 동안 붕어 20마리를 잡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20마리를 잡지 못 하면 저수지에 입수하겠다”는 공약도 걸었다.

이경규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물고기 60마리를 잡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낚시신(神)의 강림이 아무 때나 오는 것은 아니었다. 낚시를 시작했으나 고기가 미끼를 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경규의 캐릭터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상황에서 제작진이 “채팅창에 신경 좀 써달라”고 말하자 이경규는 잠시 채팅창을 보는 듯했다. 그 순간 “아! 입질 왔습니다. 아! 거 채팅을 왜 보라 그래”, “채팅을 보라 그래가지고, 놓쳤잖아”라며 화를 냈다. “지금 채팅창이 급한게 아니에요. 여러분”이라더니 뒤늦게 선심쓰듯 채팅창을 읽었다. 네티즌의 한 마디, “방송이 대수야?”, “짜증내는 거 봐”, “왜 우리가 미안해야 하는 거야”라며 폭소와 함께 실시간 반응을 쏟아졌다.

어찌됐건 낚시는 대성공. 붕어 두 마리가 “제 발로 기어 올라왔다”. 이경규는 화를 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붕어들이 줄을 섰다”며 해맑게 웃어보였다. 채팅창도 함께 웃었다. ‘낚시방송’이 시청률 1위에 등극한 순간이다. 이경규가 출연했던 두 번의 ‘마리텔’ 방송은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에 가깝다.

‘마리텔’의 성공 키워드는 흔히 세 가지로 꼽힌다. ‘자기만의 콘텐츠’, ‘소통’, ‘재미’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춰야 성공확률이 높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이다. “시청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보고 있는 방송에서 무언가를 얻어가려고 한다. 그건 요리 레시피가 될 수도 있고, 입담이 될 수도 있으며, 남성 시청자에겐 여성 출연자가 될 수도 있다”(박진경 PD)고 한다.

이경규에겐 자기만의 콘텐츠가 있긴 했다. 첫 방송에선 자신이 기르는 강아지 아홉 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뿌꾸 두치 남순과 뿌꾸가 낳은 여섯 마리의 새끼들. 두 번째 방송에선 낚시대를 잡았다. 두 가지 모두 이경규가 사랑하는 소재다. 방송 내내 이경규는 ‘방송의 달인’ 답지 않게 방송을 하기 보단 강아지와 놀았고, 낚시를 했다. 강아지와 놀면서 드러누웠고, 낚시를 하다가도 누웠다. ‘눕방’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대응방식이 네티즌에겐 신선했다. 누워만 있다가 이경규의 성격이 드러났고, 낚시를 하던 중 이경규의 화법이 등장했다. 한 네티즌은 이경규가 ‘마리텔’ 방송 도중 채팅창을 읽으내 짜증을 내자 “이번주도 찾아온 특이점”이라고 적었다. ‘소통’을 바라는 젊은 네티즌을 쥐락펴락하며 호통치고, “짜증내는거 보라”는 네티즌의 지적에 낄낄거리며 웃는다. “방송을 날로 먹는다” 불만엔 “원래 예능의 끝은 다큐다. 오늘 방송은 내가 아닌 강아지들이 웃음을 줄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그 이상한 재미가 통했다.

한 예능 PD는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 “예능인들의 경우 프로그램에서 자꾸만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모습이 인위적으로 보여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선 이질적으로 비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워낙에 방송의 달인들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에선 진행이든 콩트든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이 있다”는 것이다. 36년차 예능인 이경규는 이 틀을 깼다. “예능의 끝이 다큐”라고 했던 본인의 이야기처럼 이경규는 이 방송 내내 자연스러웠다. 시청자가 요구하는 ‘리얼’의 끝판이었다. “채팅장 좀 읽어달라”는 제작진의 이야기에 벌컥했지만, 소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기 모습 그대로 소통했고, 그 소통에 네티즌은 응답했다.

연륜은 녹슬지 않지만, 시간의 길이는 종종 많은 ‘달인’들을 과거에 머물게 한다. 화려했던 전성기에 머뭇거리게 한다. 그러다 트렌드의 변화를 읽지 못해 도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분야를 막론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 한 때 이경규는 안방을 배꼽쥐게 했던 콩트의 달인이었고, 매끄러운 진행으로 주말예능을 꽉 잡은 명MC였다. 세월을 건너 뛴 지금의 이경규에게선 달라진 예능환경에 최적화돼가고 있는 달인의 모습이 보인다. 36년차 예능인의 유연한 사고와 끊임없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