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경험도 스승도 없이…바둑책도 한번 본 적 없는 실전의 대가…19세에 명인 등극 · 격식 파괴 한국 바둑계의 ‘야생마’
중 2때 아버지 찾으러간 기원에서 바둑과 운명적 만남…그때부터 상대만 있으면 시장서도 골목서도 승부에 상관없이 미친듯이 바둑 둬 1972년 열아홉 살에 최연소 명인 등극…20년간 군림해온 조남철 시대 막내리고 한국 바둑계에 세대교체라는 ‘제3의 물결’ 열어 실전의 가혹함 속에서 본능적으로 생존 배웠고 나만의 독특한 승부 호흡 터득…야생의 표범·잡초·자객·야전사령관 등 다양한 닉네임… 이창호·조훈현 9단 이어 세 번째로 2012년 1500승 위업 달성, 통산 타이틀 획득도 30여차례…손자뻘 후배에게도 한수 배우며 자유롭게 산다
서울 성동구 홍익동에 위치한 한국기원.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앙에 역사적인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 당대 바둑의 일인자 조남철 국수와 ‘새내기’ 서봉수(60) 프로(당시 2단)가 명인 타이틀을 놓고 불꽃 튀는 반상의 대결을 벌이는 모습. 그 아래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1972년 5월 5일, 만 19세의 서봉수 2단이 당시 일인자 조남철 8단을 꺾고 명인을 쟁취했다. 이는 한국 바둑 타이틀 전사의 첫 혁명적 사건으로, 20년간 군림해온 조남철 시대가 막을 내리고 한국 바둑계는 세대교체라는 제3의 물결을 맞이하게 된다.”
때론 짧은 기록물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법이다. 맞다. 신인 서봉수가 조남철 명인을 제압한 것은 당대 바둑사 최고의 사건이었다. 프로 입단 3년차가 한 시대를 풍미한 조 명인을 격파한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유학 한 번 가지 않은 풋내기 토종 기사가 ‘거함’을 쓰러뜨렸다는, 믿기 힘든 사실에 바둑계는 경악했다. “서봉수가 누구냐”는 전화 문의가 한국기원에 빗발쳤다고 한다.
한국기원에서 만난 서 명인(서봉수 프로는 조 명인을 누른 이후 명인전을 5연패했고, 그래서 ‘명인’으로 불린다)은 이날의 대국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와 같이 사진을 구경했다. 한참 옛 장면을 응시하더니 한마디 한다.
“역시 조(남철) 명인은 일본 유학파답게 꼿꼿하고 범접할 수 없는 기풍으로 앉아 계시네요. 그런데 저도 패기는 있는 모습이네요. 그때는 그랬나 보네요.”
그렇다. 서봉수는 분명 패기가 있었다. “가진 것이 없었으니 잃을 것도 없었죠. 그러니 당당하기는 했겠죠.”
다만 그가 가진 패기의 색깔은 달랐다. 질경이같이 참으로 질겼고, 잡초같이 밟아도 밟아도 끈질기게 다시 일어났으며, 들짐승같이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야성이 살아 숨쉬었다. 그게 서 명인의 생명줄이었다. 한국 바둑계에서도 ‘주류’에서는 약간 벗어난, 그래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꿈꿀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비주류 스타’이기도 했다.
서 명인의 인생이 오늘날 의미로 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삶은 허허벌판에서 창조를 일군 기업가 정신과도 닮았고, 경기 불황에도 꿈을 잃지 않고 있는 민초들과도 유사하며, 좁디 좁은 취업문으로 낙심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한 가닥 ‘멘토’로 자리 잡고 있다.
서 명인은 분명 이상한 사람이었다. 한국 바둑계를 이끌었던 엘리트들이 거의 죄다 일본 유학파인 세상에서도 유학은커녕 그 흔한 스승 한 사람도 없었던 그가 조남철 명인, 김인 국수 시대를 깨고 ‘조훈현-서봉수 시대’를 연 주역이 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그에게 열광했고 ‘잡초’ ‘된장’ ‘야전사령관’ ‘자객’ 등의 닉네임을 주저 없이 선물했는지도 모른다. 유학 한 번 다녀오지 못한 수많은 ‘서봉수 키즈(Kids)’의 열광적 지지를 한몸에 받은 채 말이다.
정작 서 명인은 이런 별명엔 무감각하다. “전 별로 외우는 것도 흥미가 없고, 기억력도 나쁩니다. 바둑을 배울 때 실전은 많이 뒀는데 복기를 한 적도 없고, 책도 본 적도 없습니다. (바둑) 재능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재미로 뒀어요. 그러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네요.”
그의 말대로라면 절대로 이해 못할 게 많다. 뛰는 자, 나는 자가 넘치는 프로 바둑계에서 그냥 재미로 둔 바둑이 가끔 세상을 놀라게 할 명승부를 어떻게 연출할 수 있는가. 재능이 없었다면 어떻게 조훈현 프로와 같은 당대 최고의 승부사들과 멋진 격돌을 펼칠 수 있었단 말인가.
답은 그의 인생에 들어 있지 않을까.
▶내게 학교는 감옥이었다=서 명인은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집안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어머니와 단칸 웰세방을 전전하던 일, 그의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땐 다 그랬죠. 넉넉했던 집이 몇이나 됐겠어요?”
그는 학교를 싫어했다. 마치 감옥 같았다. 학교는 흥미의 대상이 아니었다. 밥 먹듯이 ‘땡땡이’를 쳤다. “공부를 못했어요. 눈은 나빴는데 뒷자리에서 받아쓰지도 못하고, 진도는 나가는데 알아듣지도 못하고. 시험 성적은 당연히 맨 뒤쪽에 있을 수밖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킨타쿤테’의 족쇄가 벗어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얼마나 학교를 싫어했는지 대변하는 말이다. 출석 미달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도 어머니가 학교에 가 통사정해 받았을 정도라고 한다.
“제가 기억력이 나쁩니다. 외우지를 못해요. 그러니 암기식 교육에 적응할 수 있었겠어요?”
‘바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고 그는 고백했다.(실제 서 명인의 형은 1980년대 대전 일대를 주름잡던 유명한 ‘주먹’이었다.)
바둑은 그에게 운명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다. 아버지께 가서 식사하러 오시라는. 바둑 1급이었던 그의 부친은 동네 기원에 자주 갔다. 기원에 갔더니 아버지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구경했다. 심부름은 까먹었다. 신기하기만 했다.
이때부터 바둑을 둔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의 상대였다. 시장통에서, 기원 앞 골목에서, 길가에서 상대만 있으면 바둑을 뒀다. 한두 사람을 이기더니 어느새 ‘소년 강자’가 돼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배문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배문고엔 당시 바둑부가 있었는데, 서 명인의 이름을 듣고 일종의 스카우트를 한 것이다. “당시 충암고는 유명했는데, 배문은 그렇지는 않았어요. 거기에서도 학교보다는 거리를 헤맸지요.”
노량진기원은 그의 놀이터였다. 죽치고 살았다. 거대한 먹성을 보였다. 마구잡이로 실전을 치렀다. 지면 지는 대로, 이기면 이기는 대로 그냥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 흔한 스승 하나 없었다. 유일한 스승이라면 당시 노량진기원에 나왔던 아마추어 강자 이원식 씨였을 게다. 막강한 상대인 그에게 처음 2점을 놓고 뒀다. 어느새 맞두게 됐고, 어느 날 그를 이겼다.
서 명인의 불가사의한 힘은 바로 이것이었다. ‘실전.’ 먹성 좋은 하마같이 ‘실전’을 먹어치울수록 그는 강해졌다. 훗날 한국 바둑을 주름잡던 조훈현, 이창호 프로 등이 일본 유학 또는 거장 밑에서 사사한 ‘엘리트’였다면, 허허벌판에서 외로운 늑대처럼 본능적 승부 기질을 배가시킨 서 명인의 바둑의 힘이 바로 실전이었던 것이다.
“복기 한 번 한 적 없습니다. 일본에서 발간한 바둑 책 한 번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바둑 두는 게 재미있어 뒀고, 그냥 좋아서 반상에 앉아 있곤 했습니다.”
▶명인은 용틀임의 시작이었다=서 명인은 바둑계의 기인이었고, 어쩜 반란자였다. 실전만으로 실력을 키워 그가 바둑 최고봉에 올랐다는 사실에 아직도 많은 사람은 의아해한다.
서 명인과 호형호제하는 박치문 중앙일보 바둑전문기자는 이렇게 규정한 적이 있다. “서봉수는 대성(大成)의 3대 요소 중 좋은 선생과 빠른 입문은 구비하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조훈현(5), 이창호(8) 프로가 바둑을 배웠을 때와 프로가 됐을 때보다 훨씬 늦은 입문, 당대 최고 스승들에게 사사한 숱한 고수들과 달리, 선생 하나 없었던 그에겐 누구 못지않은 ‘재능’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서 명인은 재능이 있다는 그런 평가도 거부한다. 외우기를 체질적으로 싫어하고 수학책은 보기만 해도 졸린데, 바둑에서 절대 필요하다는 암기력ㆍ복기력ㆍ수읽기를 자신과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그저 바둑 두는 게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자장면을 걸고 둬도 좋고, 어른이 주선한 내기바둑(큰 판은 아니었다고 한다)을 둬도 좋고…. 그냥 바둑판에 바둑알을 올릴 수 있다는 게 좋았단다.
“그냥 좋아하는 것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요. 저를 자유롭게 만든 대상이 바로 바둑이었을 겁니다.”
그렇다. 그의 바둑의 힘의 원천은 ‘자유’였다. 틀에 박힌 바둑, 사문(師門)의 기풍에 얽매이지 않는 바둑, 남들은 무식한 수라고 비판을 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눈에는 분명 옳은 수를 강행하는 바둑…. 이런 바둑을 둘 수 있는 자유로움은 그의 최대 무기였다.
이 같은 연장선상의 기행(奇行)도 그를 강하게 만들어줬을 게다. “1970년 양상국 프로와 함께 입단을 했습니다. 매일 술좌석에도 같이 있었지만, 바둑판 하나 달랑 메고 공부한답시고 절에 처박혀 있기도 하는 등 남 보기에 기이한 행동도 같이한 친구지요.”
결국 그는 일을 낸다. 프로 입문 2년 뒤인 1972년 당시 최고의 자리인 명인을 차지한 것. 프로 3년차가 당대 최고 실력자인 조남철 명인을 꺾으리라고는 예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게 당시의 상식이었다. 한국기원이 이를 ‘혁명적 사건’이라고 규정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서 명인의 묘한 인생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명인이었으되, 최고수는 아니었다. 명인이 된 이후 신예 기사들에게도 패한 적이 많았고, 얼토당토않은 수로 망한 바둑을 두기 일쑤였다. 우연히 명인이 됐다는 주변의 비아냥도 적지 않게 나왔다. 정제되지 않은 ‘토종 바둑’의 한계였을까.
하지만 정통 이론이 아닌 ‘잡학 바둑’의 위력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당대 최고수인 조훈현 9단과 라이벌로 부상한 것도 이 시기다. ‘조-서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창조의 힘이었을 게다. 틀에 박힌 바둑을 싫어하다 보니 서 명인의 바둑은 두터운 실전형으로 완비돼 갔고, 같은 수를 다시 쓰지 않을 정도로 독창적이면서 굳건한 바둑으로 둔갑돼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1993년 자신의 최고 승부로 꼽는 응씨배 우승(오타케 히데오에 3대 2 승)을 차지한 것도, 1997년 진로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반 집 승 3번을 연출하며 파죽의 9연승으로 글로벌 강자들을 경악시킨 것도 이같이 잡초에다 창조를 더한 실전 바둑의 힘이 바탕이 됐다.
박 전문기자의 평론은 설득력이 있다. “서봉수는 실전의 가혹함 속에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배웠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승부 호흡, 즉 실전적 직관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서봉수는 훗날 ‘야생의 표범’으로 불리고 ‘실전의 대가’라는 칭호를 거쳐 ‘야전사령관’에 이르게 된다. 그 원동력 속엔 헝그리 정신과 함께 내기바둑 특유의 실전 감각이 녹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은 앞으로도 바둑, “한길을 판다”=서 명인 앞엔 늘 대기록이 따라붙는다. 1994년 통산 1000승을 넘었고, 2012년 1500승 위업을 달성했다. 1500승 돌파는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에 이어 세 번째다. 총 2392전에 1512승3무877패(2012년 11월 12일 현재)를 기록했다. 응씨배 우승 등 통산 타이틀을 획득한 것도 30차례나 된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바둑에 관한 한 배고파한다. “큰 판에 명국이 없다고, 제가 둔 (응씨배 등) 바둑은 실수투성이였어요. 다만 상대방도 실수를 해줘 운 좋게 이긴 겁니다.”
보다 완벽한 바둑, 마음에 드는 바둑을 두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반어법이다.
엄살도 떤다. “요즘 젊은 친구들(젊은 프로기사) 힘이 보통이 아닙니다. 머리도 좋고 체력도 좋으니, 저는 매일 져요.”
격식이 없는 바둑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굳이 무게를 잡을 필요도 없나 보다. 서 명인은 요즘 모르는 게 있으면 자식뻘, 손자뻘의 후배들에게도 한 수 한 수를 물어본다. 깨우침이 있다면 너털웃음을 짓고 매우 좋아한다는 게 한국기원 관계자의 귀띔이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그만의 철학이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물었다. 엉뚱한 대답이 돌아온다. “요즘 다 어렵잖아요. 경기도 안 좋고, 젊은 친구들 일자리도 없다고 하고…. 제가 뭐 말할 자격이 있나요. 다만 한길을 계속 가다 보면 답은 있다는 겁니다. 좋아하는 일,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20년쯤은 같은 길을 꿋꿋이 가면 정상도 보이고, 최고도 보이며, 만족도 보이는 것 아닐까요?”
쉽게 포기하는 젊은 세대, 어려운 일이면 금방 싫증을 내는 후학들에게는 분명 교훈이 될 유효한 메시지로 보인다. 작게는 젊은이의 좁디 좁은 취업 전선, 크게는 글로벌 경기 불황과 경기 침체로 고전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활로도 혹시 여기에 해답은 있지 않을까.
서 명인은 자신은 내세울 것은 없지만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카드에 몰입하기도 했고, 화투에 열중하기도 했으며, 당구ㆍ탁구도 원 없이 쳤다고 했다. 미친 듯이 게임에 몰두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해볼 것 다 해봐서 후회는 없다고 했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 윤기현, 하찬석 등 일본 유학파가 득세하던 시절, 순수 국내파로 한국 바둑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이 같은 ‘자유롭게 미쳤던’ 열정을 간직했기 때문일 게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의외의 멘트가 나왔다. 서 명인은 이 얘기만은 꼭 해야겠다고 했다. 한국 바둑계에 관한 것이었다. “바둑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바둑 두는 어린이들은 점점 없고, 이러다 보니 미래 한국 바둑계가 위기를 넘어 재앙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말도 들립니다. 한국 기원이 앞장서서 장ㆍ단기 계획을 서둘러 세워야 합니다.”
바둑 프로기사도 더 많이 배출하는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바둑인과 프로기사가 기득권을 의식해 개혁을 방관하는 것은 안 된다고도 했다. “더 늦으면 백약이 무효인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바둑 대중화를 위한 특단책을 실행하고 바둑 입문(入門)을 활짝 넓혀야 한국 바둑계에 희망이 있어요. 이러다간 중국에 완전히 밀립니다.”
샌님같이 수줍어만 하던 시니어 프로기사가 바둑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처럼 정색을 하고 톤을 높이는 것을 보면 바둑계가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더니 한 마디 덧붙인다. “시니어 대회도 많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저도 먹고살죠. 하하하.”
처음엔 된장 냄새 구수하게 풍기던 서 명인. 빵 터지게 만들면서 맨 마지막 공배를 가볍게 채워버린다.
사진=정희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