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7> 감추어진 승부 (81)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영어글씨가 깨알같이 박힌 종이에 얼떨결에 서명하고, 제 발로 걷긴 했으나 사실상 질질 끌려들어간 곳은 6인용 병실이었다. 물론 남녀 7세 부동석이라, 유호성은 남자 병실로, 현성애는 여자병실로 각각 나뉘었다.
처음 한 시간 정도는… 간호사가 약 주면 날름 받아먹고, 옆 환자가 물 줘도 냉큼 받아 마시곤 했을 뿐이었다. 하긴 그 때까지만 해도 N-Dos 특공소령이 살포한 신경가스에 중독된 후유증이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적 ‘고추 먹고 맴맴’ 놀이를 한 뒤 그 후유증 때문에 전봇대에 머리를 박았던 상황과 비슷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막 가스중독 후유증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쯤에 또다시 번잡스러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개가 나이롱환자들이었는지… 슬리퍼나 질질 끌면서 옆 병실로 마실 다니던 환자 중 한 명이, 들어서는 안 될 소문을 듣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헤이! 암지이 게 탕로낭! (Amjee ke tangronang!)”
그 환자는 얼굴이 벌개 진 채로 소리 질렀다. ‘암지이 게 탕로낭?’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말로 ‘이봐, 의사 불러오라고! 의사 어디에 있어?’ 정도의 티벳말이었다. 이를테면 열 받았다는 뜻이겠지.
곧이어 의사가 들이닥치고, 간호사가 뛰어 들어오고, 원무과 직원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열 받은 환자와 마주서서 뭐라고 한동안 수다를 떨더니… 원무과 직원이 다짜고짜 유호성의 뒷덜미를 잡아 병실 밖으로 내쫓는 게 아닌가.
“어이쿠, 왜 이러슈? 왜 이래?”
왜 이러긴… 어느새 유호성이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그러니 당장 내쫓아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상황이었다. 게이와는 함께 나란히 누워있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
“갈레 페!”
‘갈레 페?’ 그야말로 안녕히 꺼지시라는 말이었다. 어쨌거나 눈치 9단인 유호성은 원무과 직원의 음성과 행동만으로도 전후사정을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병원에선 쫓겨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는데… 환자복이라고, 밀가루 포대처럼 생겨먹은 헝겊쪼가리 한 장만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내 옷! 내 옷이라도 줘야 나가든 말든 할 거 아뇨?”
유호성은 이렇게 외쳤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다. 병원 유리문은 누군가가 굳게 닫아 걸은 지 오래였고, 그를 병원 문밖으로 내팽개친 원무과 직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아니… 여보세요! 야! 야, 인마!”
밀가루 포대 차림의 옷에, 그래도 양 손을 옆구리에 짚고 으름장을 놓아 보았지만 말짱 도루묵이었다. 게다가 이건 또 뭐냐? 원무과 직원에 의해 질질 끌려나오다시피 하는 또 한 명의 환자는… 바로 레즈비언으로 오해받은 현성애였다.
“호성 씨!”
“아이고, 성애 씨마저?”
“지금 저 안에서 모리타니아 군인들이 원무과 직원들과 싸우고 있어요. 하지만 곧 끌려나올 게 빤해요. 워낙에 어리버리 한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상황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현성애는 금세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남보다 유독 날씬해서인가? 그녀가 걸쳐 입은 밀가루 포대 즉, 인민병원의 여성용 환자복은 헐렁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길이가 몽땅해서 허벅지까지 드러났고, 상체를 조금만 앞으로 굽혀도 젖가슴이 온통 들여다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니 오가는 티벳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수밖에.
“호성 씨, 이걸 어째? 어떻게 좀 해봐요.”
어떻게 하긴… 그들은 일단 구경꾼들을 피해 무작정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