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병기 기자]누구나 한때는 친했다가 사이가 틀어져 연락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을 한두 명쯤은 두고 있을 것이다. 친했던 관계가 무너지면 상실감과 배신감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이를 그냥 두고만 있을 것인가. 관계를 복원하려고 해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고, 그 계기를 찾기도 쉽지 않다. 사람들이 갈수록 화를 많이 내는 이유 중 하나가 서로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갈등을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다. 팍팍한 현대사회에서 화와 분노에 차있는 사람이 관계마저 회복하지 않는다면 쉽게 살기 힘들다. 조금만 용기를 내 용서를 먼저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지난 4월부터 E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용서’는 그런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시청률이 3%대에 이르는 코너들도 있다.
‘용서’는 갈등 당사자가 극한의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공동의 규칙을 만들고, 협력 또는 분열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리얼 실험 다큐멘터리다. 용서의 심리학, 사회학적 메커니즘을 밝히고 진정한 용서에 이르는 길을 제시해 용서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단초가 되도록 한다.
갈등 당사자인 두 사람은 하루 간격으로 따로 외국으로 떠나 현지에서 만난다. 처음에는 여전히 남아있는 앙금을 떠올리며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높은 산을 등산하면서 땀도 흘리면서 극한상황에 처하면 서로를 돌아보게 된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또 한 사람이 손을 내밀게 된다. 용서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선물주기, 서로 배려하기, 물 한 컵주기가 있어 마음을 푸는 계기가 된다.
SBS ‘짝’이 6박 7일 동안 남녀가 ‘애정촌’에 들어와 연애에만 집중하듯, ‘용서’도 일상과는 달리 여행기간(8~13일) 내내 둘의 관계에만 집중해 그동안 쌓인 불신을 허심탄회한 대화로 허물 확률을 높인다.
▶여행장소는 용서와 화해에 어울리는 맞춤형=두 사람의 여행장소도 심리학자의 자문을 얻어 주로 험한 지역, 오지를 택한다. 주로 동남아의 산악 트레킹지대나 시골이지만 무인도에 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심리적으로 서로 의지하고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 나오기 쉽게 하기 위해서다. 대부분 5일째 정도 트레킹을 하다보면 화해하기 위해 응어리진 과거를 끄집어내게 된다고 한다. ‘정치폭력배 용팔이(김용남)와 칼잡이 길정운’편은 길정운이 김용남 밑에서 폭력조직원으로 있다 15년 옥살이를 했지만, 김용남이 자신을 돌봐주지 않은 것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았다. 둘은 히말라야를 오르며 극한상황에 처하자 진정으로 화해했다.
용서와 화해에 어울리는 맞춤형 장소를 찾아주기도 한다. 운명의 라이벌, 올림픽 레슬링 메달리스트 김원기와 안대현은 필리핀에서 레슬링을 하는 꿈나무들의 코치를 각각 맡아 제자들끼리 대결을 펼치게 함으로써 서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양봉을 하던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무당이 된 아들은 네팔을 여행하며 부자가 절벽에서 목숨을 걸고 벌을 채취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 화해한다. ‘한량 아버지와 불화 관계에 있는 아들’편은 아버지가 여행지에서 고아를 보고 자신도 고아로 자란 이야기를 처음으로 자식에게 들려줘 아들을 놀라게 했다.
학교폭력이 깨뜨린 두 아이의 우정이야기, 살인사건의 잘못된 증언으로 파괴된 가족의 사연, 세계 챔피언 박종팔과 영원한 맞수 이효필, 5년간의 침묵-국가대표 여자 보디빌더 이정임과 박수희, 무너진 두 개의 꿈-여자복서 소민경과 관장 박현성 등 ‘용서’의 몇몇 코너는 용서와 화해 장면들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진보 논객 진중권과 젊은 보수 이준석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제작진은 적당한 출연자를 섭외하기 위해 직업군을 나누고 스포츠인이나 연예인 등 300여명에게 닥치는 대로 연락해 갈등요인들을 찾고 있다.
‘용서’ 선희돈 팀장은 “그렇게 싸우던 당사들이 진짜 화해를 할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물론 빨리 화해할 때도 있고, 화해를 안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해외에는 언어도 안 통해 서로 의지할 마음이 생긴다. 일단 서로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용서’의 유규오 CP는 “한국 사회는 이념적, 계층적인 갈등들이 많다. ‘용서’ 제작진은 사회적인 갈등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화해하고 용서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고 더불어 사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게 취지다”면서 “용서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나 관계가 간절히 유지되기를 원하는 게 깔려있다. 참가자 중 50% 정도는 용서할 마음을 가지고 온다. 용서하려는 진성성이 있어야 감동이 있다”고 전했다.
▶화해 프로젝트를 진화시킨 ‘달라졌어요’=EBS가 ‘용서’외에도 ‘화(火)’로 인해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화풀이’, 갈등 상황에 놓인 다문화 가정의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나라를 함께 방문해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혀가는 가족 화해 프로그램 ‘다문화 고부 열전’ 등 화해 프로젝트를 연속 가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달라졌어요’라는 소통강화 또는 관계개선 프로그램의 제작 경험 때문이다.
2011년 부부, 부모, 고부 등 가족 간의 갈등과 해결책을 다룬 ‘달라졌어요’ 파일럿 방송이 나간 이후 반응이 기대이상으로 나타나자 2012년부터 가족 내의 모든 유형의 갈등과 심지어 직장상사까지 다뤄보자는 취지로 대대적인 ‘달라졌어요’ 시리즈를 만들어오고 있다.
‘달라졌어요’ 최남숙 CP는 “속사정을 보면 모든 가정에 아픔 한 가지씩은 다 있다.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책을 찾는 ‘달라졌어요’가 성과가 좋았고, 사람들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구나 하는 점을 느껴 ‘용서’와 ‘화풀이’로 진화한 것이다”고 말했다.
고질적인 가족갈등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방송을 본 시청자들 중 일부는 “연출이 아니냐” “실제 개선되냐” 등 효력에 대한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하지마 최 CP는 “우리가 원할 때 이들이 싸우고, 울어주겠는가? 그렇다면 이들은 연기자다. TV에 나오는 사례자들은 일반인이다. 적어도 3개월 간 제작진, 전문가들과 같이 있으니까 치료 효과는 확실히 있다”고 전했다.
사실 ‘달라졌어요’나 ‘용서’ 등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야 한다. 창피한 모습들을 전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출연을 결정하는 순간 치료의 반은 시작된 거다.
지상파의 일부 예능 프로그램이 관찰예능, 다큐예능이라는 미명아래 출연자의 상처, 고민 등을 자극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EBS의 화해 프로젝트들은 적어도 사례자들의 상처를 가십으로 다루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있다. 그래서 ‘달라졌어요’에 출연을 원하는 신청자들은 꽤 많다. 자식들이 신청하는 경우도 많다. 2~3개월 동안 강도 높게 솔루션을 찾아나서지만 솔루션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사실을 직면하기 힘들다며 거절하는 사람도 있다. 상호 신뢰 관계를 뜻하는 심리학 용어인 ‘라포(rapport)’가 형성되어야 치료효과가 높아진다.
‘용서’는 사후관리를 하지 않지만, ‘달라졌어요’는 치료 후 힘들어하거나 소통에 대한 의문점을 문의하면 전화로라도 상담받을 수 있게 해준다. 일단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맛을 봤기 때문에 자력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좋은 관계의 선순환구조를 만들어주는 게 목표다.
서병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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