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3회> 감추어진 승부 87
썬라이즈 호텔 꼭대기층 복도, 디럭스룸이 이어져 있는 그 복도에는 소화기에서 터져 나온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천정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대포알만한 소화기에서 쏟아져 나온 거품은 순식간에 복도 일부분을 버블 목욕탕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아이고, 허리야!”
신희영은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거의 70㎝에 달하는 소화기 끝에서 미끄러져 떨어졌으니 허리가 요절난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막하던 이른 아침의 호텔 복도에서는 와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데굴데굴 소화기 구르는 소리가 요동쳤다.
거품이 천정에 닿으면서 아마도 화재감지기를 작동시킨 모양이었다. 원래 화재감지기는 연기가 자욱하게 주위를 뒤덮으면 사이렌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거품이 그득 들어찬 것이 마치 연기가 들어찬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맛! 호…호성 씨, 불났어요, 불!”
“불? 불? 이걸 어쩌지?”
유호성은 이를 앙다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염병! 이제 막 천국의 문으로 들어서려는데…이제 막 감고 있던 눈꺼풀이 훤하게 달아오르면서 입안에 신 침이 돌기 시작하던 중이었는데…뭐가 어째? 불이 났다고?
“잠깐만, 성애 씨, 조금만 더!”
그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도 그녀의 다리를 여전히 어깨 위에 둘러메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100만 더 세면 지겟작대기 끝에서 불이 터져 나올텐데 이 상태로 중단할 수는 없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잠깐만, 100만 더 세자고. 하낫, 둘….”
“호, 성, 씨! 이러다가 통닭되려고 그래요? 불났다니까?”
“그래도…조금만!”
“불났다고요! 불!”
현성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두 발로 유호성을 걷어찼다. 유호성은 뒤로 한 발이나 나자빠진 뒤에야 정신이 들었는지 허겁지겁 포대자락을 찾아 머리부터 뒤집어쓰고는 현성애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 역시 방바닥에 나뒹굴던 포대자락을 찾아 얼른 뒤집어썼다. 포대자루는 벗기도 쉬웠지만 입기도 여간 쉽지 않았다.
“저기 비상벨부터 눌러요!”
현성애가 호들갑을 떨자 유호성은 벽에 부착되어 있는 화재고지용 비상벨의 커버를 찾아 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작은 뚜껑을 눌러 깨뜨린 뒤에 붉은 단추를 힘차게 누르자 ‘따르르릉!’하는 벨소리가 썬라이즈호텔 전체로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문 앞에서 소화기를 밟고 넘어져 있던 신희영은 느닷없이 울려 퍼지는 비상벨 소리에 정신마저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더이상 요절난 허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낼 수만은 없었다. 당장에라도 옆방 사람들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남자가 호성이라면…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염병, 객지에서 통닭될 뻔 했네’ 어쩌고 하면서 옆방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마침 소화기에서 뿜어져 나온 거품이 천정까지 들어차 있던 통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웠는데…그야말로 신희영에겐 천만다행이었다.
“호성 씨, 같이 가요. 유호성! 같이 가자니까?”
허겁지겁 뛰어가는 남자는 거품 속에서 보아도 분명한 제 아들 유호성이었다. 더구나 그 뒤를 따르는 여자가 증명이라도 하듯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는가. 신희영은 벌렁대는 가슴을 다잡지 못하던 중이었는데…충청도 출신인가? 그제야 박박진진이 복도로 나와 그녀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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