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4>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5)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운무처럼 뿌연 먼지와 함께 몰려오던 랠리 카들은 순식간에 신 압록강대교를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앞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던 클래식 카들은 어느새 대교의 맨 가장자리 4차로에 줄지어 서있었고, 나머지 3개 차로에 진 치고 있던 중계카메라도 허겁지겁 대교 가장자리로 물러나 기 시작했다.
‘우루룽~ 피융!’ 가슴을 울렁이는 엔진폭발음과 함께 선두로 달려오는 머신은… 핏빛처럼 붉은 색이었다. ‘로열골드’라면 햇빛을 반사하며 황금빛으로 달려 들어와야 마땅했고, ‘1974년 산 치타’였다면 잿빛으로 달려 들어와야 마땅했다. 그런데 붉은색이라니.
붉은색은 이탈리아 머신의 고유색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중조 국경을 통과하여 북한 영토를 밟는 자는 이탈리아 선수일 것이다. 그 뒤로 프랑스의 머신, ‘아쥐르’라 일컬어지는 푸른 하늘색 머신이 쏜살같이 달려 들어왔다. 그와 거의 순서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바짝 뒤쫓아 들어오는 머신은 오렌지색, 네덜란드 머신이었다.
황금빛을 반사하며 달려온 로열골드는 아쉽게도 4등! 힘겹게 달리는 꼴로 보아 결코 선두로 나설 수는 없을 것만 같았는데… 랠리 대열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카페에서 묵묵히 그 모습을 관망하던 재벌2세와 도종호 상무는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에어 뮬’ 개발에 성공했군요. 이게 모두 회장님과 왕회장님께서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덕입니다.”
“고맙습니다, 상무님. 권도일 선수가 약속대로 4등을 유지하고 있네요. 다른 머신보다 두 배 이상의 거리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저렇게 마음대로 순위조절을 할 수 있다니… 에어 뮬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 당장 왕회장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하, 이미 중계방송을 보고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4등으로 겨우 달리는 모습을 보고 아랍 석유재벌들도 더 이상 태클을 걸지는 않겠지요.”
그들은 조용히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권도일 선수가 모는 로열골드가 4등으로 겨우 달려오자 크게 낙심한 사람은 유한솜이었다. 그녀는 권일주를 태운 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눈물짓고 있었다. 내심 선두로 치고 들어올 것이라 믿었던 오빠 유호성이 ‘브라보 골프! 원더풀 골프!’를 외치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던 그녀는, 결국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얘야, 인생이란 게 다 그런 거란다. 뜻하는 대로 언제나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거든. 그게 정상이란다. 그러니 너도… 그만 내 곁을 떠나라. 정상적으로 사는 길을 찾아가려무나.”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떠나다니요?”
“내 아들, 도일이에게 들어서 다 알고 있단다. 한승우라는 청년… 한 때 너희 아버님 회사에서 전략기획실장을 맡아보다가 일방적으로 직무해제 당한 그 청년이 네 진정한 짝이란다. 그 청년은 3년째 조용히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구나.”
“한승우? 아! 생각나요, 아버님… 하지만 저를 도일 오빠와 결혼하게 해주세요. 그것만이 저희 가문 때문에 피해를 당하신 아버님께 보답하는 길이에요. 저를 제발 쫓아내지 마세요.”
“어허! 정상적으로 사는 인생이 아름다운 법이야. 나도 이제야 깨달았단다. 나도 한동안 몹쓸 생각에 젖어있었어.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지. 네 아버님, 어머님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테지만… 나부터라도 먼저 깨달았으니 다행이야. 가라! 내일 당장 집으로 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압록강 건너 북한 땅에서는 예원희 기자의 양부 도형철과 인민무력부 공지호 부부장, 당 중앙 군사위원회 곽승철 위원, 그리고 제6 사단장이 양각도 호텔외국인 전용식당에서 축하주를 들이키는 중이었다.
랠리대회를 성공적으로 유치함으로 인해 신의주에서 개성에 이르는 국도를 대폭으로 넓힐 수 있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6사단장의 당 서열은 2단계나 뛰어 올랐다. 또한 골프 활성화를 핑계로 클래식 카 동호회를 끌어들여 6천억 원을 챙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지호, 곽승철, 도형철 모두 당 서열이 2단계씩 뛰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도형철은 그 모든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만약 서열이 뒤집어졌다면 또다시 계급투쟁에 휘말렸을 텐데, 모두 공히 2단계씩 오르는 선에서 끝났으니 오죽이나 좋은가. 이제 남은 소원이라면 수양딸 예원희를 좋은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일 뿐이었다. 원희의 성격이 워낙 까칠하니 시집보내는 일도 결코 만만치는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기쁘기 한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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