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1) 글 채희문 | 그림 현경희
도형철은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예원희가 말한 대로 평양의 아파트 값 세 채에 달하는 골동품 차들이 일일이 화면에 비쳐지고 있었다. 화면 아래로는 고딕체 글씨로 조합된 자막이 줄줄이 흐르고 있었는데…
‘저게 벤쯔 아닌가? 위원장 동지가 타시는 차와 똑같은 마크! 동그라미 안에 들어있는 삼각의 별! 정말 감개무량하구만.’
도형철은 너무나 감격해서 자칫하다간 뒷목을 잡고 쓰러질 지경이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아무 일에나 놀라 뒷목을 부여잡곤 했다. 남조선에선 스트레스라고 한다더구만,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급작스럽게 닥치는 모든 일엔 프레스를 받기 십상이었다.
1928년 형 ‘메르세데스 벤츠 680S’가 선두를 달리고, 그 뒤를 이어 1938년 형 ‘롤스로이스 레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뿐인가 그 뒤로는 1937년 형 ‘BMW 328 스포르트 카브리올레’가, 또 그 뒤로는 1949년 형 ‘재규어 XK120 로드스타’가, 그 뒤를 따라서 1964년 형 ‘페라리 250LM’이 형체를 드러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웬 일이네? 어째서 내 딸 예원희가 안 보이는 거이디?’
도형철은 마른 침을 삼키다가 이내 무선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예원희가 말한 대로라면 행렬 맨 앞에 그녀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등장해야만 했다. 예원희가 타고 있을 골동품 차도 ‘이소타 프라치니’라는 희한한 이름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벼가며 자막을 확인해 봐도 ‘이소타 프라치니’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원희야, 이게 어찌 된 일이네? 어째서 네가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고 있네?”
참 세상 좋아졌다는 생각, 주먹만 한 전화기의 다이얼을 누르기만 하면 외국에 나가있는 딸과 언제라도 통화할 수 있다는 생각… 도형철은 예원희와 통화할 때마다 이런 생각부터 했지만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통화접촉이 이루어지자마자 대뜸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기에 바빴다.
“아바지, 잠시만 기다려 보시라요. 원래 각본에 따르면 우리가 제일 앞장섰어야 했는데… 잠시 서로 간에 다툼이 생겼단 말이디요. 그래서 늦어진 것 뿐입네다. 하지만 3분, 3분만 기다리면 곧 텔레비전에 내 모습이 보일 겁네다. 홧김에 텔레비전 끄지 마시고 기다려 보시라요. 지금 행렬 앞으로 달려가고 있습네다.”
예원희는 숨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뭔가 다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을 밝히자면… 이랬다. 인민광장 한 귀퉁이에서 졸지에 처가 싸움을 보게 된 움라우트 패튼 회장은 강유리와의 사랑전선에 불길한 징조가 서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동화처럼 만나 사랑하게 된 강유리가 콩가루 집안의 공주라는 걸 즉시 알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민광장을 빠져나왔다. 원래는 장인어른인 강준호를 만나서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행렬에 복귀할 예정이었다. 젊은 동방의 연인 강유리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에 바쁜 일정을 쪼개어 틈을 낸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장모가 나타나고, 장모의 샛서방이 등장하고, 장인 장모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그러느라 시간을 낭비해서 카퍼레이드 출발시간에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생중계가 이루어지는 행사에 지각하게 되었으니 어쩌나. 움라우트 회장은 마침 인민광장 귀퉁이에 서있는 영업용 택시를 잡아타고 급히 행사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단둥에는 근래에 들어 영업용 택시가 2천 대나 생겨났지만 이용하는 손님이 적어 빈차가 수두룩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강유리는 아버지고 나발이고, 신희영 회장이고 자시고 간에 역시 빈 택시를 잡아타고 움라우트 패튼 회장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물론 예원희도 또 다른 빈 차를 잡아타고 강유리의 뒤를 쫓아 달렸다. 강준호와 현성애, 신희영과 박박진진이 놀라 엉거주춤 하는 사이에 상황의 긴박함을 깨달은 유호성마저 택시를 잡아타고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3분이 지난 것일까? 도형철이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드디어 해괴한 일이 생중계되기 시작했다. 허공에 뿌려져 펄럭이던 오색 색종이들이 미처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클랙슨을 요란하게 울리며 넉 대의 영업용 택시들이 다투어 퍼레이드 행렬 앞으로 끼어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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