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5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5
인민광장 한 귀퉁이에서 자기네 가족 간의 계보가 꽈배기처럼 꼬이는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유호성은 새로 건설한 압록강대교가 훤히 바라보이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현성애가 마주앉아 있었으나 둘은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꾸역꾸역 밥만 먹고 있었다.
“기분이 무척 더럽군. 어째서 랠리 관계자들이 우리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당장 모래구덩이를 파고 치타를 찾아내서 포탄 맞은 흔적을 확인하면 될 거 아냐?”
“이제 그만해요. 더 이상 설치다간 아예 정신병자로 몰릴 수도 있어요. 세상에… 망측하기도 해라. 뭐가 어째 우리가 동성연애자라고?”
“열 받으니까 그렇지. 우린 아무 잘못도 없이 랠리 경기를 기권한 신세가 되어버렸다고. 완주도 못했으니 꼴찌 한 것보다도 더 한심해.”
“꾹 눌러 참아요. 저기 북한 아가씨들의 아리랑 공연이나 구경하자고요.”
식당 안에서는 북한 종업원들이 어설픈 아리랑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음식을 주문받고 서빙을 하다가도 불현듯 간이무대로 올라가 공연을 벌이곤 했다. 그들은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본국에서 엄격한 심사를 받은 후에 선발된 학생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저 아가씨들 예쁘지요? 단체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돈을 번대요. 이곳 단둥에서 2년 정도 일하면 시집 갈 밑천을 번다는데요?”
“저 아가씨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성애 씨야말로 시집 갈 밑천을 홀랑 날렸으니 어쩌지? 테러만 당하지 않았어도 상금으로 10만달러는 따냈을 테고, 그 돈을 반반씩 나누어도 5천만원이 넘는 거금인데.”
유호성의 말을 듣고 난 현성애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10만달러 좋아하네. 10만달러를 상금으로 받으려면 적어도 8등 안으로 결승선을 밟아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날고 기는 선수들 틈에서 8등 안에 들기가 그리 쉬운가?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그뿐이랴? 요즘 들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러시아 선수들을 모두 젖혀내야 겨우 20등 안에 들 수 있을까?
아무리 주판을 튕겨 봐도 1974년 산 치타의 기름통에 구멍을 뚫어놓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유호성이 랠리를 포기하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해주기만 해도 현찰 2천만원을 주겠다던 신희영 회장의 제안이야말로 얼마나 현실적인가?
“시집 갈 밑천은 필요 없어요. 날 데려가겠다는 남자도 없는데요, 뭘.”
“그래요? 그럼 나한테 시집올래요?”
유호성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물었다. 신소리를 해대는 걸 보니 이번 랠리 경기에서 탈락한 아쉬움을 달래기가 무척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현성애는 그의 신소리가 대못이 가슴에 박히는 것처럼 아프게 들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요.”
“어째서 말이 안 돼? 고백하건대 이번 랠리를 함께 뛰면서 진심으로 마음에 담았던 생각이라고요. 이런 개고생 집어치우고 차라리 성애 씨와 함께 서울 변두리에 커피점이나 차려서 오순도순 살고 싶더라니까?”
“준 재벌 아들이 서울 변두리 커피점 주인이나 하려고요?”
마침 디저트로 찰떡 아이스크림이 나왔지만 현성애는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자고 유호성은 남의 가슴에 대못 질을 하는 걸까? 그녀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귀에 들려오는 유호성의 제안은 달콤했지만 머릿속에 오가는 상념은 어지럽기 한이 없었다. 벌써 몇 년이 흘렀나?
현성애는 그 언젠가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선 특등실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창틀에 두 손을 짚고 바다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뒤에서 유민 회장은 무슨 짓을 했던가? 유민 회장은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엉덩이에 뜨거운 입김을 쏟아 붓지 않았던가? 더 기막힌 것은 그 짓을 현성애가 더욱 갈구하며 즐겼다는 사실이었다. 유민 회장은… 지금 그녀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는 유호성의 아버지 아니던가? 그런데 결혼하자고? 하느님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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