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한석희 기자]# 지난해 12월 빅마켓 영등포점. 매장 문이 열리려면 족히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이른 시간인데도 매장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오전 9시 매장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캐나다구스 익스패디션 행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백화점에서 125만원 하는 것을 79만9000원에 살 수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 점포는 준비한 물량의 90% 이상을 당일 하루 만에 팔았다.
# 지난 4일 코스트코 양평점 커피머신 드롱기(DeLonghi) 매대 앞. “이거 병행수입 제품 아니에요? 병행수입 제품은 정식 제품과는 차이가 있던데… AS도 안 되고.” 시중에서 30만원이 넘는 제품을 14만원대에 팔자 한 주부(40대)가 제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판매점원은 “병행수입 제품은 아니고요. 저희 정식 업체에서 수입하는 거예요. AS도 전혀 문제없고, 다른 매장의 제품과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정부는 이르면 오는 3월부터 병행수입을 활성화하기 위해 ‘수입부문 경쟁 제고 방안’을 마련한다. 병행수입품의 품질을 인정하는 통관인증과 관련된 진입장벽을 완화하는 게 골자다. 한국에만 상륙하면 턱없이 치솟는 소비자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가 빼든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일선 현장에서 병행수입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상반된다.
‘한국 소비자는 봉’이라는 불명예스런 한국 유통시장에도 ‘가격 경쟁’의 바람이 불 것이라는 시각에서부터, 가격이 떨어지기는커녕 수입명품에 대한 ‘로열티’만 구축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시각도 나오고 있다. 여기엔 사후서비스(AS)에 대한 부차적인 문제와, ‘짝퉁’과 ‘진품’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한국 유통의 현주소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란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한국 소비자는 봉…‘거품 공화국’=유통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국내 수입제품 판매 가격은 미국에 비해 최대 4배 이상 높다고 한다. 일본에 비해서도 최소 20~30%가 비싸다고 한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통상 도매가격의 2.5배인 미국 소비자가격이 한국에만 오면 4~5배로 껑충 뛰어오른다”고 혀를 찼다.
실제 소비자단체인 소비자시민모임(소시모)이 지난해 미국ㆍ일본ㆍ영국ㆍ호주 등 세계 15개국 주요 도시의 화장품, 생활가전제품, 가공식품 등 60개 제품의 국제물가(환율 반영)를 조사한 결과 스마트폰과 노트북, 커피메이커 등은 15개국 중 가장 비싼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벨기에 키플링의 ‘클라스챌리지백’은 미국에서 99달러(약 10만6128원)에 팔지만, 국내에선 18만8000원에 팔린다. 스토케 유모차는 117만9200원 하는 것이 국내에선 159만8000원으로 둔갑한다.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값은 한국에서만 유독 4배가량 높다. 하이네켄 맥주는 15개국 중에서 3번째, 샤넬 향수는 5번째로 비싸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이에 대해 “○○○코리아 같은 외국 브랜드의 공식 수입업자의 횡포가 심하다”며 “값이 비쌀수록 명품 취급을 하는 국내 소비자들의 허영심을 파고들어 터무니없이 가격을 올려놓은 측면이 많다”고 말했다.
▶병행수입은 만병 통치약?…가격인하 효과는=정부가 ‘병행수입 활성화’ 칼을 빼든 것도 이 때문이다. 병행수입이 늘면 가격도 자연스레 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일각에선 병행수입이 활성화되면 최대 30~40% 이상의 가격 하락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병행수입→가격하락’의 선순환 구조는 미약하지만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소비자들 사이에서 가격 거품이 심하기로 유명했던 랄프로렌코리아는 지난해 8월 병행수입품과의 가격 경쟁을 위해 아동복 가격을 40% 낮췄다. 스낵 프링글스는 한 대형마트가 병행수입을 통해 가격을 낮추자, 이 대형마트에만 기존 가격보다 25%가량 저렴한 기획팩을 제작해 별도로 공급했다.
하지만 병행수입이 가격하락의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병행수입→가격하락’의 선순환 구조로 이뤄지기 위해선 병행수입 시장이 전체 수입시장의 20% 이상으로 늘어야 할 뿐 아니라, 짝퉁 시장에 대한 규제와 ‘국내 독점판매 계약’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선 병행수입시장 규모가 너무 작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현재 국내 병행수입시장 규모는 약 2조원으로 전체 수입시장의 3~4%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의 병행수입시장이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과는 규모적으로 차이가 크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병행수입 시장이 최소 20% 이상은 돼야 실제 가격인하 효과가 나올 수 있다”며 “정부가 당장 병행수입 시장을 활성화한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가격 효과가 나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무엇보다 짝퉁 시장에 대한 규제가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일본에서 병행수입이 크게 늘 수 있었던 것도 일본에는 짝퉁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짝퉁과의 구별을 위해 인증제도를 실시하고는 있지만 그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오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있다. 짝퉁 시장이 존재하는 한 병행수입은 되레 소비자들에게 혼란만 부채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가격이 비쌀수록 명품’이라는 허황된 소비심리도 문제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코스트코와 이트레이더스, 빅마켓 같은 창고형 할인매장을 중심으로 병행수입도 늘고 있고, 가격도 다른 곳보다 20~30% 싸지만 이것이 가격인하 효과로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다”며 “일부 명품의 경우엔 병행수입이 늘수록 오히려 공식 수입제품에 대한 충성도만 높이는 악순환도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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