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
엘리소 비르살라제 4년 만의 내한
마스터 클래스부터 연주회까지
백마디 말보다 연주로 보여준 수업
“선생님의 확고한 음악관 만난 시간”
모차르트부터 쇼팽까지 이어지는 공연
“음악이 어려운 것은 정답이 없기 때문”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칠흑 같은 단발 머리, 검은 호수 같은 깊은 눈…. ‘러시아 피아노의 전설’ 엘리소 비르살라제(Elisso Virsaladze·80)가 왔다. ‘완벽주의 피아니스트’의 상징인 80대의 거장. 이번 내한은 무려 4년 만이다.지난해 예정된 공연이 어깨 통증으로 인해 취소됐기 때문이다.
비르살라제는 본지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작년에 오지 못해 너무나 슬펐다”고 말했다.
“설령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 하더라도 그동안 공연을 취소한 일이 거의 없었기에, 작년 공연을 취소한다는 건 나에게 정말 큰 일이었어요. 공연을 기다리고 오려고 했던 관객들을 생각하면, 공연을 취소하는 건 언제나 마음이 좋지 않아요. 스스로도 공연을 기다렸고, 정말 오고 싶었어요.”
■ 백마디 말보다 연주로...“확고한 음악관 만난 시간”
다시 찾은 한국에선 연주회는 물론 마스터클래스도 진행했다. 지난 23일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에서 마스터클래스엔 금호영재 출신 하륜, 박해림(17, 서울예고), 김재희(18)가 참석했다.
스무 살이던 1962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3위를 차지하며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비르살라제는 타고난 연주자이면서 뛰어난 스승이기도 하다. 뮌헨 국립음대와 모스크바 음악원을 오가며 많은 제자를 길렀고, 차이콥스키 콩쿠르, 루빈스타인 콩쿠르, 게자 안다 콩쿠르 등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1위에 오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를 비롯해 알렉세이 볼로딘, 한국 피아니스트로는 박종화 김태형이 그의 제자다.
비르살라제의 마스터클래스는 꼼꼼하고 섬세하다. “피아니스트로 살면서 스스로 100% 만족한다고 느낀 무대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다섯 번 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엄격한 완벽주의자인 그의 성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들려준 연주로 학생들에게 육화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수업 방식이다.
이날 수업에서 가장 많이 강조된 것은 ‘레가토’(둘 이상의 음을 어이서 부드럽게 연주하는 것)였다. 한 음 한 음 실수 없이 소화하려는 학생들의 연주는 때때로 경직됐다. 비르살라제는 레가토가 없는 연주, 레가토가 충분히 담긴 연주를 비교하며 직접 피아노를 들려줬다. 성장하는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점과 지나치기 쉬운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작곡가에 대한 이해부터 빠른 패시지를 연주하기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이나 피날레를 진행할 때 필요한 것들, 건반 위 왼손과 오른손 역할의 차이점이 강조됐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제3번 b단조 Op.58. CT. 203’의 1, 3악장을 연주한 박해림 학생과 수업할 땐 비르살라제가 왼손의 역할을, 박해림 양이 오른손을 담당하며 두 대의 피아노가 하나가 되면 명장면도 연출됐다. 어린 학생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와 연주를 더한 ‘눈높이 수업’이었다.
박해림 양은 “직접 연주해주시는 걸 보고 들으니 이해가 더 잘 됐다”며 “특히 왼손 터치와 레가토로 연주하는 방법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쇼팽의 ‘피아노를 위한 야상곡 제3번 B장조, Op.9 3악장’을 연주한 하륜 군은 “그 많은 16분 음표를 연주할 때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흐름이나 터치에 대해 알려주신 것이 깊이 남았다”고 했다. 슈만의 ‘피아노를 위한 카니발, Op.9’를 연주한 김재희 양은 “선생님께서 티칭해주시며 연주를 보여주실 때마다 연주가 너무 좋아 놀라웠다.매우 섬세한 해석을 들려주셔서 깜짝 놀랐다”며 “이번 마스터클래스를 통해 연주한 곡의 흐름과 구조를 잘 잡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세계적인 거장과의 만남은 학생들에게 의미있는 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륜 학생은 마스터클래스를 마친 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생님이어서 다른 콩쿠르나 오디션보다도 떨렸다. 시작 전 악수 해보니 거장 피아니스트답게 파아노를 많이 친 손이었다. 손끝이 단단했다”며 “선생님의 확고한 음악관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 “음악은 스포츠처럼 측정할 수 없어...작곡가의 마음에 다가설뿐”
비르살라제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통 계보를 잇는 피아니스트로 불린다. ‘전설의 피아니스트’ 야코프 자크, 겐리히 네이가우스가 그의 피아노를 이끈 중요한 스승이다. 호로비츠(1903~1989), 리흐테르(1915~1997)와 한 시대를 이끌었고, 소련(현 러시아) ‘최고예술상’을 받았다. 그의 이름을 따르는 제자들도 숱하다.
비르살라제는 “‘러시아 피아니즘’이라는 것은 단지 나에겐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세대의 연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스승으로부터 ‘음악적 유산’으로 전해질 수 있겠지만, 큰 의미는 없어요. 반드시 그 나라의 스승에게서 배워야만 그 나라의 문화와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중국의 피아니스트 푸총(Fou Ts‘ong)이 들려준 쇼팽 연주는 폴란드 사람이 아님에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줬고, 제게 큰 감동을 줬어요.”
강행군처럼 이어지는 한국 일정은 24일 예정된 연주회(금호아트홀)로 마무리된다. 이번 한국 공연에선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쇼팽의 피아노를 위한 야상곡 7·8번을 연주한다. 그는 “고전과 낭만의 작품들을 함께 연주하는 것이 흥미롭다”고 했다.
“바로크, 고전, 낭만과 같은 음악 사조를 구분하는 것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 사실 그 음악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서로 다른 사조의 음악은 그 안에 담긴 음향이나 상상력이 크게 다르고, 공통점을 찾자면 두 작곡가 모두 ’천재‘라는 점일 거예요.”
이번 공연에선 “두 천재적 작곡가의 음악”에 한 발 더 다가서려고 한다.
“음악이 어려운 것은 절대적인 정답이 없고, 스포츠처럼 측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에요. 그저 매번 작곡가들의 마음과 생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지 고민하고 노력할 뿐이에요.”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은 조지아 출신이면서도 러시아 피아노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가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심경은 참담하다. 비르살라제는 “오래 이어지는 이 전쟁에 대해 가슴 깊이 슬프고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다.
“그 어떤 상황이든, 자신에게 정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음악인으로서 내면의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지금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책임감이에요.”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