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페예프, 한국 데뷔 무대
정확하고 단단한 타건에 더한
화려한 기교와 제어된 연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제 위치로 착륙한 로켓처럼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타건은 정확하고 단단했다. 역동적인 타건에 귓가엔 아름다운 스릴이 넘쳐났다. 화려한 기교와 달리 몸짓은 정적이었기에, 간간이 등장하는 그의 작은 제스처는 관객의 눈에 사진처럼 남았다. 눈을 지긋이 감고, 오른쪽으로 45도쯤 고개를 돌리면 한 음 한 음 신중히 소리를 확인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왼손 검지를 들어올려 박자를 맞추듯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왼팔로 원을 그리며 감정을 지휘한다. 그 모든 동작이 음악이 돼 기이한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러시아의 신동’으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데뷔 리사이틀 서울(롯데콘서트홀)과 인천(청라블루노바홀)에서 각각 열렸다. 앞서 5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며칠 앞두고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내한하지 못한 말로페예프에게도 이번 연주회는 오래 고대한 무대였다. 앞서 본지와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관객들의 지지를 알고 있었기에 한국 데뷔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말로페예프는 동세대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특별한 자리에 있다. 2014년 열세 살의 나이로 차이콥스키 영아티스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위에 오르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았다. 이미 세계적인 지휘자들의 협연자로 발탁돼 한 무대에 섰다. 리카르도 샤이는 말로페예프에 대해 “그는 영재를 뛰어넘어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어려워하는 음악적 깊이, 테크닉, 음악성, 기억력 등 모두를 갖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 공연에서 그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메트너의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 작품번호 22’, 스크리아빈의 ‘5개의 프렐류드, 작품번호 16’,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 작품번호 33’을 연주했다. 베토벤을 제외하면 모두 러시아 작곡가로 구성된 프로그램이다. 말로페예프는 연주회의 프로그램을 온전히 스스로 결정한다. 그는 “이 곡들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내면의 잠재된 감정에 주목해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그것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든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스톰프뮤직 제공]
이미 수많은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베토벤, 메트너,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했으나 말로페예프의 것은 조금 다르다. 그는 작곡가에 대한 공부와 작품 해석 과정을 심도있게 거치고, 자신이 얻은 답을 확고하게 밀고 나간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결론이 말로페예프의 기교와 깊은 감성, 음악성을 만나 새로운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연주는 마치 말로페예프의 몸을 빌린 다른 차원의 존재가 들려주는 것과 같은 청각의 충격을 안겼다. 관객은 ‘러시아 피아니즘’을 보여준 말로페예프의 무대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자신들의 방황과 불확실성의 시기에 맞서며 소나타를 통해 각자의 캐릭터를 표현”했다고 본 베토벤의 ‘템페스트’, 메트너의 ‘피아노 소나타 사단조’에선 묵직한 타건으로 깊은 심상을 드러냈다. 폭풍같은 격정이 몰아치다가도 이내 감정을 조절하고, 벼락 같은 타건으로 객석을 압도한다. 스크리아빈에선 작곡가의 순수성을 보여주려는 해석이 두드러졌다. 조금은 가벼워진 타건은 소리에 청량감을 줬고, 그러면서도 정확하게 음표를 짚는 힘 있는 타건은 어떤 잡음도 끼어들지 않은 찬가로 들려줬다.
말로페예프의 라흐마니노프는 보다 특별했다. 스스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음악가”라고 꼽는 만큼, 말로페예프의 작곡가에 대한 애정이 깊다. 이날 연주한 ‘회화적 연습곡’은 놀라운 표현력과 맑은 소리가 객석을 압도했다. 많은 젊은 연주자들이 라흐마니노프의 기교에 사로잡힐 때 말로페예프는 깊숙이 자리한 내면의 감정에 집중했다. 그것은 슬프지만 처량하지 않고, 출구 없는 터널을 헤매지만 매몰되지 않았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말로페예프는 터치가 단단하고 공격적인데, 그 안에서 대조를 만든다”며 “스크리아빈과 메트너는 흐름이 좋았다. 특히 라흐마니노프 ‘회화적 연습곡’은 굉장히 설득력이 강했다. 사실 원래 이 작품은 이렇게 작곡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연주를 들려줬다”고 평했다.
오래 기다린 무대를 모두 마치고 말로페예프는 관객들의 박수에 수차례 다시 나와, 무려 6곡의 앙코르를 연주했다. 관객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와 함성을 보냈고, 말로페예프는 쑥스러운듯 웃으며 몇 번이고 건반 앞에 앉았다.
앙코르 역시 하나 같이 엄청난 기교를 요했다. 플레트뇨프 편곡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 중 파드되를 시작으로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메트너의 ‘회상 소나타’, 프로코피예프 ‘토카타’를 지나 메트너의 ‘요정 이야기’, 다시 플레트뇨프의 ‘호두까기 인형’ 중 트레팍으로 마무리됐다.
허명현 평론가는 “프로코피예프 ‘토카타’, 발라키레프 ‘이슬라메이’에선 곡의 본질과 그것이 효과적으로 들리기 위해선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며 “각각의 곡의 다양한 측면들이 입체적으로 들렸다. 이제 20대가 된 연주자의 나이를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특히 플레트뇨프의 편곡 버전 ‘호두까기 인형’에선 가공할만한 기술과 노련한 연출이 돋보였다”고 평했다.
이틀간의 한국 공연은 말로페예프의 명성과 그를 향한 세상의 평가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이에 더해, 만 스무 살이 된 말로페예프라는 피아니스트의 현재를 온전히 보여줬고, 그의 내일을 기대하게 했다.
허명현 평론가는 “빠르고 강하면서도, 편안한 연주를 위해선 음들을 유기적으로 잇는 민첩함이 필요한데, 말로페예프는 이런 점들이 기본적으로 훌륭하다”며 “복잡한 음악 속에서도 톤을 컨트롤 하는 능력이 돋보였고, 쏟아지는 음표들도 잘 정리돼 들렸다. 의외로 야성적인 충동이라는 건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잘 제어된 연주를 들려줬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계보를 잇는 연주자다”라고 평했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