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바이오기업 피씨엘, 54조 버는 ‘골리앗’과 각축
[헤럴드경제=박준규·정경수 기자] 업력 134년의 글로벌 ‘톱티어’ 헬스케어 기업인 애보트는 지난해 430억달러(약 55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2008년 설립된 헬스케어 분야 토종 기업인 피씨엘(PCL)이 기록한 작년 매출은 461억원. 단순히 견주면 1000배 넘는 차이다.
시장가치도 비교가 무색하다. 25일 기준 애보트 시가총액은 우리돈으로 약 251조원. 코스닥에 상장된 피씨엘 시총(2690억원)을 크게 앞선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급등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두 회사의 ‘체급’ 차이는 현격하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나란히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가 지난해 가을부터 진행하고 있는 12차 혈액선별기 신규 구매 입찰사업에서 맞붙고 있다. 관련법에 따라 여전히 벤처기업으로 분류되는 피씨엘이 입찰에 참여했단 사실 자체만으로 이른바 ‘K-바이오’ 기술의 무서운 성장세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있단 평가가 나왔다.
피씨엘은 그간 소수의 다국적 바이오기업들이 휘어잡고 있던 혈액선별기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장비 개발을 위해 100억원에 달하는 예산이 들었다. 정부지원금도 투입됐다.
혈액선별 작업은 수혈한 혈액 속에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B·C형 간염, 인간T세포백혈병 같은 치명적인 질병균이 존재하지 않는지를 판별하는 작업이다. 한 방울이라도 제대로 걸러지지 않은 피가 누군가에게 수혈된다면 치명적이다. 때문에 검사장비는 무결점의 정밀성이 요구된다.
피씨엘의 혈액선별기는 국내외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최고등급(4등급) 허가를 받아냈고, 유럽 체외진단의료기기 안전성 인증(CE-IVD)도 최고등급(리스트 A)까지 확보했다. 피씨엘은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 판로개척에 나서려는 계획을 세웠다.
피씨엘의 장비에 관심을 보이는 외국의 파트너들은 ‘자국 판매 실적’을 구매하기 위한 근거로 기대한다. 국민의 건강권에 직결된 의료기기를 구매하려는 입장에서는, 해당 업체가 그 나라에서 신뢰를 받고 있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지난해 국내 업체들이 코로나19 자가진단키트를 국외로 대량 수출할 수 있었던 것도 국내서 널리 시판된다는 점이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대형 혈액선별기 차원에선 국내 ‘큰손’인 적십자사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하루에만 수천건이 넘는 혈액을 검사하는 기관이다. 적십자사가 혈액 공급과 관리업무를 사실상 독점하는 국내시장에선 그들이 핵심 수요처다.
지민구 피씨엘 부사장은 “우리는 대형 업체와 비교해 기술력은 물론 장비의 가격 경쟁력을 갖췄다. 대한적십자가 써준다면 동남아, 아프리카 시장을 노려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적십자는 애보트(미국)와 지멘스헬시니어스(독일)가 만든 장비를 16년째 쓰고 있다. 이들 글로벌 기업들은 자국 정부와 혈액원 지원을 배경삼아 혈액선별기를 비롯한 체외진단장비를 공급하며 글로벌 면역진단 시장에서 파이를 키웠다. 일본적십자도 외국 장비를 사용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 자국 기업이 만든 제품으로 전환했다.
이는 단순히 자국 기업을 밀어주기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다. 전문가들은 ‘기술 주권’을 확보한다는 의미를 짚는다.
김병건 한국조달연구원 혁신조달지원센터장은 “특별한 문제가 생기거나 혈액선별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이 나타난다면 결국 외국기업의 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며 “공공조달 제품의 해외 의존도를 (지금처럼) 높은 수준을 유지하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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