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 뉴스를 보고 잠이 들었는데, 개들이 피 흘리며 싸우는 꿈을 꾸었다. 나는 개를 무서워해 길을 가다가도 내 앞에 개가 나타나면 길을 건너가 피한다. 아무리 작고 순하더라도 반려견이 있는 친구 집 현관 문턱을 넘지 않으며, 개가 있는 미용실에는 가지 않는다. 그런데 꿈에 개를, 피 흘리며 싸우는 개를 보았다. 불길했다.
우크라이나와 사랑에 빠진 나는 전황이 궁금해 BBC CNN 뉴스를 거의 매일 시청한다. 벌써 4주째 러시아 군에 포위되어 물도, 음식도, 의약품도 없이 고립된 마리우폴(Mariupol) 시민들은 얼음을 녹여 식수로 삼고 난방이 끊긴 지하 벙커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피난민의 안전한 대피를 위해 ‘인도주의적인 통로(Humanitarian corridor)’를 열어주기로 합의하였지만 러시아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무차별 폭격으로 학교와 병원과 극장 등에서 아이들이 죽었다.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푸틴의 광기를 저지해야 한다. 내가 가진 무기는 글, 그리고 진실뿐. 나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의 딸이며, 소설 ‘흉터와 무늬’를 쓰려고 한국전쟁 관련 책과 사료를 많이 읽었다. 그래서 전쟁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지 잘 알고 있다.
윈스턴 처칠 이후 최고의 전시 지도자라는 찬사를 받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용기와 우크라이나 국민을 단합시키는 소통 능력도 뛰어나지만 우크라이나의 전직 대통령 페트로 포로셴코의 애국심도 나를 감동시켰다. 시민방위대와 함께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CNN 기자에게 “러시아가 오늘은 우리를 공격하지만 내일은 당신들을, 전 세계를 공격할 수 있다.”고 말하던 포로셴코.
현직 대통령과 전직 대통령의 호홉이 이렇게 잘 맞다니. 부럽다. 전직과 현직 지도자가 으르렁대며 다투는 모습만 보아서 그런지, 보안 때문에 언론에 맨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운 젤렌스키 대통령을 대신해 방탄 조끼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서 여론전을 이끄는 포로셴코 전직 대통령이 멋있어 그가 방송에 나올 때마다 귀를 기울인다. 용감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놀라게 하였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앉아서 글만 쓰지 말고, 평화를 염원하는 해시태그만 달지 말고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였다. 2월 27일 일요일 저녁. 집을 나서기 전에 모나미 형광펜으로 마스크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그리고, 서랍을 뒤져 노랑과 파랑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
시청역에 내려 서소문 길로 접어들자 옛 생각이 많이 났다. 아버지가 일하던 사무실 바로 옆에 러시아대사관이 있다니. 자원 입대해 철의 삼각지에서 싸운 총알받이 소대장, 하늘나라에 계신 당신을 생각하며 걷는데 (반대 방향에서 오던) 젊은 남자가 날 막아선다. “저~ 사진 좀 찍으면 안 될까요?” “안 돼요. 지금 약속이 있어서…”라고 답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A를 더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
시민 대여섯 명이 따로따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A 옆에 서려는 내게 대사관 정문을 지키던 경찰이 다가와 ‘간격을 유지하라’며 훈시했다.
우린 이미 충분히 간격을 유지해 2m쯤 떨어져 서 있는데 지나친 간섭이 아니꼬워 한마디 했다. “여긴 내 나라 내 땅이야….” 애국심이 희박한 내 입에서 ‘내 나라’가 나오다니.
전쟁은 참 많은 걸 바꿔 놓는구나.
시인·이미출판 대표
meel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