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약을 필로폰 원료로 악용한 일당

빈 아파트서 필로폰 1.36㎏ 만들어

한약사·약국 직원 등 원료 공급 가담

경기 평택의 한 빈 아파트에 필로폰 제조에 사용된 화학약품과 각종 제조도구가 놓여 있다. [서울경찰청 제공]
경기 평택의 한 빈 아파트에 필로폰 제조에 사용된 화학약품과 각종 제조도구가 놓여 있다. [서울경찰청 제공]

[헤럴드경제=김도윤 기자] 교도소 수감 생활 중 알게 된 마약 ‘기술자’들로 팀을 꾸려 경기도 평택의 빈 아파트에 필로폰을 몰래 만든 이들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제 마약의 원료는 약국에서 판매하는 일반 감기약이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마약범죄수사대는 제조 총책인 60대 A씨 등 13명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검거해 이중 4명을 구속송치했다고 3일 밝혔다.

검거 과정에서 압수된 필로폰 1.36㎏은 시가로 42억원 상당으로 약 4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이다. 경찰이 국내 감기약 이용 필로폰 제조 사건에서 압수한 양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경찰에 따르면 A씨 등 5명은 경기 평택의 한 아파트에 필로폰 제조 장비를 갖춘 뒤 지난해 4월부터 올해 6월까지 감기약에서 마약 제조에 사용되는 원료물질인 ‘슈도에페드린’을 추출해 필로폰 1.36㎏을 제조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현장에서 슈도에페드린 635g과 각종 도구와 방독면, 황산·염산 등 유해화학물질도 압수했다.

A씨는 교도소 수감 생활 중 알게 된 기술자 등을 출소 후 다시 불러 모아 범행을 계획했다. 이후 역할을 부여해 필로폰 제조에 필요한 의약품과 화공약품 등을 조달하도록 했다. 특히 시공사와 시행사의 유치권 분쟁으로 장기간 비어 있던 평택의 한 아파트를 범행 장소로 골랐다.

경찰이 압수한 필로폰 1.36㎏과 슈도에페드린 635g. 압수된 필로폰은 약 4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국내에서 감기약을 이용한 필로폰 제조 사건 중 최대 압수량이다. [서울경찰청 제공]
경찰이 압수한 필로폰 1.36㎏과 슈도에페드린 635g. 압수된 필로폰은 약 4만명이 동시에 투약할 수 있는 양으로, 국내에서 감기약을 이용한 필로폰 제조 사건 중 최대 압수량이다. [서울경찰청 제공]

이들은 인터넷에 공개된 과학실험 영상과 해외 논문 등을 참고해 필로폰 제조 방법을 연구했다. 범행 초기 6개월 동안 시험 제조를 반복했지만 실패하자 처음 섭외한 기술자를 필로폰 제조 경험이 있는 다른 기술자로 교체하기도 했다.

일당은 제조에 성공한 지난해 10월부터 본격적으로 필로폰을 만들기 시작해 약 8개월간 범행을 이어갔다. 총책 A씨는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아파트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와 주차 차단기 등을 이용해 외부인의 출입을 감시했다. 대량생산을 위해 화공약품 등을 별도로 보관할 창고까지 마련했다.

이들은 “봉사활동을 위해 감기약이 필요하다”는 등의 구실로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전국의 약국을 돌아다니며 필로폰 제조에 사용할 감기약을 대량으로 물색했다.

범행에는 한약사와 약국 직원 등도 연루됐다. 30대 한약사 B씨는 이 과정에서 A씨가 필로폰을 제조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올해 1~6월 사이 6차례에 걸쳐 감기약 1만610통을 판매해 제조를 방조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B씨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약국이 아닌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감기약을 거래한 혐의도 받고 있다.

B씨의 동료인 약국 직원은 약사 자격이 없는데도 A씨 일당에게 감기약을 판매한 혐의를 받는다. 필로폰 제조에 쓰인 황산과 염산 등 약품을 판매하면서 거래 내역을 관리대장에 기록하지 않은 화공약품 판매업자 2명도 검거됐다.

경찰은 지난해 12월 관련 제보를 접수한 뒤 잠복과 압수수색 등 수사를 벌여 제조시설을 특정하고 지난 6월부터 제조 피의자 5명을 순차적으로 검거했다. 특히 60대 총책 검거 당시 그의 소지품에서 다량의 완제품 필로폰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필로폰 제조 현장인 아파트 내부. 감기약통이 파란 대형 봉투에 담겨 쌓여 있다.[서울경찰청 제공]
필로폰 제조 현장인 아파트 내부. 감기약통이 파란 대형 봉투에 담겨 쌓여 있다.[서울경찰청 제공]

경찰은 디지털 포렌식 등을 통해 감기약과 화공약품 공급 과정에 관여한 관련자 8명도 추가로 검거했다.

경찰은 또 사건과 관련한 범죄수익 1억3000만원을 환수하고, 거래 자료를 남기지 않고 감기약을 사고판 도매업체 등의 탈세 정황을 포착해 국세청에 고발을 의뢰했다.

경찰 관계자는 “슈도에페드린이 함유된 감기약의 전문의약품 전환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id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