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인공지능(AI)으로 만든 매력적인 여성 코미디언들이 실제 코미디언의 농담을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훔쳐 쓰고 있다. 이들이 주로 노리는 대상은 젊은 여성 코미디언이다. AI가 관객의 취향과 반응까지 바꿀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최근 SNS에는 벽돌 벽을 배경으로 공연하는 여성 AI 코미디언 계정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들은 짧은 상의와 몸에 딱 붙는 보디슈트 차림으로 유혹적인 농담을 던지며 수십만 명의 팔로어를 모았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농담은 실제 코미디언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코미디언 올리비아 카터가 다듬어 선보인 농담은 AI 코미디언에게 한 글자도 바뀌지 않은 채 복제됐다. 다만 표현력은 원작자에 못 미쳤다. 올가 네이머가 친절한 남성과 데이트한 경험을 연기한 코미디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적인 외모로 만들어진 AI 코미디언은 네이머의 대사와 타이밍을 그대로 따라 했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연기로 이야기를 전했고 결말은 원본보다 조금 더 어두웠다.
이번 도용의 피해자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AI 코미디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연애와 성관계를 소재로 하는 젊고 유명하지 않은 여성 코미디언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짐 개피건이나 데이브 셔펠 같은 유명 남성 코미디언을 흉내 내는 컨텐츠는 없었다. 관객과 즉흥적으로 주고받는 영상으로 화제를 모아 온 뉴욕의 코미디언 내털리 쿠오모는 데드라인 인터뷰에서 자신의 농담 7~10개가 도용됐다고 밝혔다.
이런 방식은 영화 ‘엑스 마키나’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이 영화는 억만장자 기술기업가가 남성의 시선을 사로잡도록 매력적인 여성형 안드로이드를 설계하는 이야기다. 마크 저커버그의 소셜미디어도 남학생들이 여학생의 외모를 평가하는 서비스에서 출발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끄는 여성형 AI 코미디언 역시 비슷한 욕망을 이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사람들의 반응도 주목된다. 로봇이 인간과 지나치게 비슷해질수록 거부감이 커지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인간 코미디언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가짜 계정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이용자들은 실제 코미디언과 AI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구분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이달 초 농담을 도용당한 코미디언들이 잇따라 경고 영상을 올렸지만 플랫폼의 대응은 미온적이었다. 애덤 모세리 인스타그램 최고책임자는 피해 코미디언의 계정에 댓글을 남겨 원작 창작자에게 더 많은 이용자가 유입되도록 하고 싶다고 밝혔다.
다만 AI 콘텐츠 자체를 금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덧붙였다. 코미디 업계에서 남의 농담을 훔치는 일은 오랫동안 평판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잘못으로 여겨졌지만, AI 코미디언에게는 망신을 주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AI가 실제보다 성적 매력을 강화한 현실을 파는 할리우드의 오랜 공식을 따르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술기업들이 이미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시장을 바꿔 놓았다는 차이가 있다. 전통적인 방송 네트워크가 쇠퇴하면서 젊은 코미디언들은 생계를 위해 SNS에 의존하게 됐다. 팔로어를 늘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분노를 유발하거나 성적 매력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점은 업계의 공공연한 사실이다.
네이머는 자신의 농담을 복제한 AI 영상이 원본보다 더 많은 호응을 얻는 것을 보고 영상을 올려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농담이 훌륭하다는 건 알아요. 문제는 내 가슴이었던 거죠.”
가짜 코미디언 계정의 운영 주체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젊은 여성 코미디언의 농담을 훔치는 전략에는 암울한 사업 논리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SNS의 보상 체계가 실제 여성 코미디언에게 성적인 소재와 이미지를 올리도록 유도했고, 그 결과 AI가 손쉽게 가져다 쓸 수 있는 콘텐츠가 대량으로 쌓였다는 것이다. 기술기업들이 인간의 노동을 활용하다가 모방품의 품질이 충분히 높아지면 인간을 생산 과정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피해는 유명 스타로 확산할 조짐도 보인다. 최근 가상 코미디언들은 코미디클럽 무대를 벗어나 가짜로 만들어진 심야 토크쇼 진행자의 책상 옆에 앉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AI가 관객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까지 학습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관객은 원래 기발한 발상과 치밀한 구성,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지는 결정적 한마디를 기대하지만, 작품의 수준을 구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점점 수동적이고 쉽게 조종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짜 코미디언 영상에서는 무대 위 코미디언뿐 아니라 객석의 관객까지 컴퓨터로 생성된 경우가 많다. 미리 넣어둔 관객의 웃음소리는 시청자가 웃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실제로 효과가 있다. AI가 코미디의 사회적 성격을 거꾸로 이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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