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호조에 네고 물량 쏟아지며 원화 강세
100만불 환전액, 환율 1500원 때보다 1.6억 감소
반도체는 가격·물량으로 방어…車·석화는 비상
[헤럴드경제=이정환 기자] 반도체 수출 호조가 원/달러 환율을 끌어내리면서 수출기업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시장에 내놓을수록 원화 가치가 오르고, 이는 다시 수출기업의 원화 환산 매출과 영업이익을 깎아내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동사태 영향으로 국제유가마저 배럴당 100달러에 육박하면서 기업들은 환율 하락에 따른 채산성 악화와 원자재 가격 상승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했다.
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의 오후 3시30분 기준가는 전 거래일보다 9.5원 내린 1336.1원으로 집계됐다.
중동 정세 불안과 국제유가 급등에도 환율을 끌어내린 것은 반도체 기업을 비롯한 수출업체의 네고(달러 매도) 물량이었다. 월 중순 결제대금을 송금해야 하는 수입업체와 해외주식 투자자의 달러 매수 수요보다 수출기업이 내놓은 달러가 더 많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반도체 수출 호조가 외환시장에서는 오히려 환율 하락 압력으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이 수출로 확보한 달러를 원화로 바꾸면서 시장 내 달러 공급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월말에 집중됐던 수출업체의 네고 물량도 최근에는 수시로 출회되고 있다.
문제는 바로 달러 공급 확대가 수출기업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원/달러 환율이 떨어지면 같은 금액을 수출해도 원화로 환산한 매출이 줄어들게 된다. 예를 들어 100만달러의 수출대금을 환전하면 환율이 1500원일 때는 15억원을 받지만, 1336.1원에서는 13억3610만원에 그친다. 단지 환율 변동만으로 1억6390만원이 눈 앞에서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환율 하락 속도가 빠를수록 그 충격은 더 커진다. 기업들이 계약 당시 예상했던 환율보다 실제 수출대금을 회수하는 시점의 환율이 낮으면 환차손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달러 표시 판매가격을 올리기도 쉽지 않아 기업이 환율 하락분을 고스란히 떠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환헤지 여력이 부족한 중소 수출기업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다. 대기업은 선물환이나 통화옵션 등을 활용해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비용과 전문인력 부족으로 적극적인 대응이 어렵다. 국내에서 원재료를 조달하고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원화 강세의 부정적인 영향도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업종별 명암도 엇갈릴 전망이다. 글로벌 초과 수요가 이어지는 반도체 업종은 환율 하락에 따른 원화 환산 실적 감소를 판매량과 가격 상승으로 일부 상쇄할 수 있다. 반면 자동차·석유화학·철강·기계처럼 글로벌 공급 경쟁이 치열한 업종은 제품 가격을 올리기 어려워 수익성 악화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날 수 있다.
다만 원화 강세가 모든 수출기업에 악재인 것은 아니다. 수입 원재료 비중이 높은 기업은 달러로 지급하는 비용이 줄어 환율 하락의 충격을 일부 흡수할 수 있다. 결국 수출 비중과 원재료 조달 구조, 결제 통화, 환헤지 여부에 따라 기업별 손익이 갈릴 것으로 보인다.
국제유가 급등은 환율 하락의 긍정적인 효과마저 제한하고 있다.
한국시간 9일 오후 4시20분 현재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11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전장 대비 2.1%(2.10달러) 오른 배럴당 100.02달러를 기록했다. 브렌트유 선물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긴 것은 지난 7월 24일 이후 처음이다. 미국과 이란의 교전 재개로 호르무즈해협의 원유 수송 차질 우려가 커진 데다 홍해 항로에서도 후티 반군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된 영향이다.
원화 강세가 원유 수입가격 상승을 일부 상쇄할 수 있지만 유가 오름세가 장기화하면 원재료비와 물류비 부담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석유화학·항공·해운 등 에너지 사용 비중이 높은 업종에서는 원화 강세에 따른 비용 절감보다 유가 상승에 따른 부담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달러화 자체도 약세를 보였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오후 3시30분 기준 98.669로 전날보다 0.185 하락했다. 엔/달러 환율은 153.206엔으로 0.46% 떨어졌고,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872.26원으로 3.07원 내렸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이 2245억원어치를 순매도했지만 환율 하락 흐름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수출 호조와 수출기업의 달러 매도가 이어질 경우 원/달러 환율이 추가로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중동 분쟁 확산과 국제유가 급등은 안전자산인 달러 수요를 자극해 환율의 추가 하락을 제한할 변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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