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에 어르신이 나타나 직원에게 대뜸 삼성전자, 아니면 코스피 ETF라도 사달라고 했다. 가사 입은 스님이 증권사를 방문해 상담을 받고 있더라, 하굣길 고교생들이 “아직도 SK하이닉스를 안 샀냐”며 떠들더라는 목격담도 나왔다. 미용실에서도 이발소에서도 택시안에서도 “주식 하시냐”가 인삿말이 됐다. 나이와 정치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터넷 커뮤니티의 온라인 게시물엔 주식 계좌 수익 인증샷과 투자 정보 관련 대화가 넘쳤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에도, 브런치를 먹는 전업 주부들의 모임에서도 온통 주식이야기였다.
‘포대기 두른 아기엄마가 객장에 나타나면 하락장의 시작이다’ ‘구두닦이 소년이 주식 이야기를 하면 팔아라’는 증권가 오랜 속설의 변종이자 현대적 버전들이다. 이 괴담 아닌 괴담은 올해 들어서만도 서너 차례 이상 ‘고점’을 경신해가며 빈도와 강도를 높여갔다. 코스피 추이로만 보자면 1월초부터 최근 약 7개월간 급등으로 인한 ‘포모’(FOMO:큰 상승장에서 수익을 내지 못한 투자자나 비투자자들의 불안과 소외감)와, 급락으로 인한 공포 구간이 최소 각각 4차례씩 있었다. “지금이라도 주식장에 들어가야 하나”는 초조감이 포모라면, ‘이러다가 거덜날라, 이제라도 다 팔고 나와야 하나’라는 심리는 공포다.
포모 구간은 1월 2일(코스피 4309)~2월 27일(6244), 4월 2일(5234)~5월 2일(7981), 5월 20일(7208)~6월 2일(8801), 6월 10일(7730)~6월 22일(9114) 등이었다. 각 구간별 1거래일 평균 지수 상승치는 49.6→130.8→159.3→153.7포인트였다. 그 사이 사이는 그만큼이나 짧은 거래일동안 지수가 급격히 떨어진 공포 구간이었다. 포모와 공포의 교차 호흡이 갈수록 가빠졌다는 사실이 수치로도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주식투자자들이 많아졌다는 의사의 증언, ‘롤러코스터’ ‘현기증’ 장세라는 언론의 비유가 과장이 아니었다. 지난 20일까지 올해 매수·매도 사이드카는 코스피 38회, 코스닥 23회, 서킷브레이커는 총 7회 발동됐다.
그리고 오래된 속설대로 우리 증시는 역대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가장 극심한 공포의 터널 구간으로 들어섰다. 6월 19일 장중 최고점 9385.59을 찍은 이후 지수가 속절없이 무너져 한달만에 6000대까지 내려왔다. 초보투자자부터 금융·기술 전문가까지 이구동성으로 ‘반도체 만세!’ ‘AI(인공지능) 포에버’ ‘고(GO)! 만스피’(코스피10000)를 외친 그 순간부터 왜 날개없는 추락이 시작됐을까?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확신은 한 순간 왜 의심으로 바뀌었을까? 2분기 삼성전자와 마이크론(미국 메모리제조사), TSMC(대만 반도체 위탁생산업체·파운드리), ASML(네덜란드 반도체 장비기업)의 역대급 실적과 전망 발표 후 오히려 주가는 왜 돌아섰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왜 하루가 멀다하고 시장을 흔들까. 우리 모두가 싸우는 자본시장의 변동성, 그 정체는 무엇일까.
은행 창구의 어르신이 ‘삼전 사달라’하는 순간, 반도체의 내리막이 시작됐다?
한국 개인 투자자들이 던지는 근본적인 의문이란 이런 것이다. AI 시대라면서, 반도체가 계속 부족할 것이라면서, 메모리 가격이 앞으로도 높을 거라면서 도대체 왜 주가는 떨어지는가. 글로벌 반도체 회사들이 역대 최고 수준의 매출과 영업이익 숫자로 증명했는데 무엇이 더 부족하다는 말인가. ‘펀더멘털’은 변함없다는데 지수는 이토록 변덕인가.
물론 사후적이거나 추론 수준의 설명은 있다. ▷반도체가 필요한 AI 빅테크의 투자가 무한 계속될 수는 없다 ▷빅테크와 하이퍼스케일러(초거대 데이터센터·클라우드 운영 기업)의 투자 대비 AI 매출·수익이 아직 온전히 증명되지 않았다 ▷AI 수요와 투자 둔화는 반도체 실적 전망을 훼손할 수 있다 ▷중국 메모리제조사의 추격세가 한국 기업의 절대우위를 위협할 수 있다 등의 ‘회의론’이 핵심이다. 여기에 글로벌 빅테크·하이퍼스케일러와 반도체 기업들 간의 가격·수급 주도권 싸움과 환율·유가·금리 등 거시경제 변수 우려, 한국 단일종목지수 2배 추종(레버리지) ETF 상장으로 인한 변동성이 결합돼 지난 5월과 6월 이후 우리 증시의 추세적 하락을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의심’이 실적의 숫자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뭔가 부족하다. ‘아기엄마’이론이나 ‘구두닦이’ 이론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아기엄마’ 이론이나 ‘구두닦이’ 이론은 모두 시장 참여자의 범위가 금융 전문가에서 일반 투자자로, 다시 신규 진입자로 확산될수록 시장이 과열 국면일 가능성이 높다는 경험칙을 담고 있다. 시장의 과열 국면이란 투자자들의 기대가 선반영 혹은 과잉반영돼 본래의 기업가치보다 주가가 더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시장 참여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상황이라고 믿고 단일한 기대와 믿음을 갖게 될 때, 유력한 금융자본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새로운 변동성을 추구한다는 가설로도 설명 가능하다.
스페인의 우승확률이 100%라면 월드컵 불가...자본시장의 본질은 ‘변동성’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의 월드컵축구 결승전에서 어느 일방의 우승확률이 100%라면 경기는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스포츠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기 전에 승패가 이미 결정돼 있다면 관중이 있을 리 없고, 어떤 리그와 토너먼트도 성립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모든 관중이 특정 팀의 승리를 확신한다면 ‘내기’는 성립될 수 없다. 금융자본주의도 이와 같아서, 자본시장 수익의 원천은 변동성과 예측불가능성이다.
금융자본과 달리 산업자본은 예측가능성이 중요하다. 산업자본은 특정의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최적의 규모와 비율의 노동·자본·기술을 결합해 안정적인 매출과 이윤을 얻으려 한다. 투입과 산출간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는 마치 대회에 임하는 스포츠팀과 같다. 팀은 어떤 상대라도 이길 수 있도록 선수를 선발하고 배치하며 전술을 짜 훈련을 한다. 우연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훈련과 전술대로 예측가능한 실전을 펼쳐 확실한 승리를 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모든 팀이 희망하는대로 100%의 승패 확률이 가능하다면, 국제축구연맹도 축구팬도 거대한 스포츠시장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금융시장의 상품은 변동성 그 자체다. 금융자본의 목표는 가격이 오르든 내리든 변동폭을 크게 해 그만큼 많은 수익을 얻는 것이다. 금융시장은 주식 현물 뿐 아니라 선물·옵션·공매도·파생상품 등 변동성을 높인 거래를 확대해왔다.
역으로 말한다면, 변동성이 적어질수록 금융자본의 기대수익은 줄어든다. 모든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와 기대가 똑같다면,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0에 수렴한다. 스페인과 아르헨티나의 결승전에서 내기 참여자 모두가 스페인의 우승에 돈을 건다면, 아무도 따지도 잃지도 않게 되고 결국은 내기 자체가 무산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시장 참여자들의 기대가 한 방향으로 과도하게 수렴하면, 증시에 들어온 대규모 투자금이나 유력 금융자본은 새로운 변동성을 탐색·발견·추종함으로써 새로운 수익 기회를 창출하려고 한다. 변동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기대가 지나치게 동조화될 때, 힘(정보와 자본력)의 격차가 큰 여러 참여자들로 구성된 시스템이 다시 불확실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는 사소한 ‘노이즈’조차 시장을 크게 흔드는 폭발음으로 증폭될 수 있다.
요컨대 지난 몇 개월 동안의 포모 신드롬과 ‘반도체 대세론’은 국내 시장 참여자들이 점점 동조화돼가는 과정이었고, 그 절정에서 나온 AI수요둔화론, 빅테크 투자 회의론, 반도체 대체·압축기술론, 레버리지ETF 출시와 같은 증폭된 충격이 ‘결국은 우상향한다’는 믿음을 크게 흔들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시장이라는 배는 파도가 출렁여야 전진할 수 있으며, 배가 뒤집히지 않는 한 더 큰 물결이 일어야 더 많이 나아갈 수 있다.
변동성과 갈등을 사랑하는 남자, 트럼프
금융시장에서는 시장의 합의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새로운 가격 변동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정치에 적용하면 사회적 합의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새로운 갈등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시장의 ‘변동성’과 정치의 ‘갈등’은 매우 닮은꼴이다. 파국적인 결과까지는 다다르지 않는 일정수준의 변동성은 금융시장에서 비대칭적 정보·자본력을 가진 대규모 투자금에게 새로운 수익의 원천이 되듯, 서열과 체체를 붕괴시키지 않은 한 사회적 갈등과 불확실성은 지배적 권력자에겐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키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수익을 극대화하는 시장의 변동성과 권력의 강화를 추구하는 사회적 갈등의 교차점엔 트럼프 미 대통령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중동전을 일으켰고, 협상과 파기를 반복했으며, 정책을 밥먹듯 바꾸고, 소셜미디어로 돌발성 발언을 반복했다. 이민·교육·선거제도 같은 내치는 물론이고 관세·통상·안보·군사·외교 대외정책도 늘 변덕스럽게 발표하고 집행하고 때로 철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엄청난 단기 변동성을 만들고, 국내외 정치 갈등을 격화시키며 금융시장, 환율, 기업투자, 공급망을 흔들었다. 그 결과는 경제적으로는 자신이 쥐고 흔든 금융시장에서 거래를 통한 막대한 차익이었고, 대중적 신뢰와 지지율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강경지지층을 기반으로 한 대통령 권한 확대, 집권층 내 충성 네트워크 강화, 공화당 내 영향력 공고화였다. 이는 모든 영장류의 우두머리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지배전략이다. 즉 집단 내 긴장과 경쟁은 일정 수준 유지시키면서, 자신에게 도전하는 연합의 형성은 억제하는 경향이다. 권력은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비대칭적으로 재배치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수익과 통치권력은 예측가능하고 안정되게 유지하면서, 환경과 타자의 변동성과 불확실성은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시장과 권력게임에서 지배적인 플레이어는 변동성과 갈등을 사랑한다.
약자의 전략: ‘시간’에 베팅하라...정보·자본력의 비대칭성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미국의 투자가이자 경제학자인 벤저민 그레이엄은 저서 ‘현명한 투자자’에서 “단기적으로 시장은 투표 기계이고, 장기적으로는 저울”이라고 했다. 단기 시장에선 ‘인기투표’와 같이 투자자들의 심리가 주가를 좌우하고,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가치가 가격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201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효율적 시장가설’ 창시자인 유진 파마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주식 전문가들이 무작위로 선택한 포트폴리오보다 더 나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며 “증거에 따르면 주가의 단기 변동을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심지어 “투자종목을 찍어 추천하는 전문가들을 점성술사에 비유하고 싶지만, 점성술사들을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고까지 냉소했다. “증권 가격(주가)이 사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을 지속적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효율적 시장 가설’의 핵심이다. 다만 그는 “장기적으로는 시장을 이끄는 것은 단기 예측이나 주가 예측이 아니라 기업의 규모와 장부가치 대비 시장가치 비율(PBR) 같은 요인”이라고 했다.
상대적으로 단기의 시장일수록 가격은 참여자들의 전략·정보·자금력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장기 구간일수록 기업의 펀더멘털(가치)과 거시경제가 가격을 결정하는 비중이 커진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하루 동안 주가를 움직이는 요소는 뉴스, 기업 내부정보, 옵션거래, 헤지펀드의 알고리즘, 기관의 프로그램 매매, 유동성공급자의 전략 등인데, 이는 개인투자자로선 알기도 대응하기도 어렵다. 단기 시장일수록 지배적인 참여자와 개인투자자간 정보·자본력의 비대칭성이 커진다.
반면 장기 시장의 가격 결정에선 기업의 영업이익,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기업 가치와 산업성장률, 금리, 생산성, 인구 같은 변수의 가중치가 높아진다. 시간이 ‘노이즈’의 영향을 줄이고 시장 참여자간 정보와 자본력을 좀 더 평준·평균화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주가와 관련해 오늘 하루의 뉴스나 내부 정보, 업계의 움직임, 투자자별 수급 동향은 개인투자자에게 매우 불확실하지만, 수년 후의 AI수요나 메모리 가격, 설비투자 계획, 기술력, 경제성장률 등은 시간이 갈수록 비교적 동등한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된다. 참여자간 힘의 비대칭성이 시간이 흐르면서 감소하는 것이다.
월스트리트 투자전략가인 마이클 모부신은 단기투자의 성과는 대부분 운에 좌우되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운의 효과는 상쇄되고 실력이 드러난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단기 환경에서는 나쁜 결정으로도 운 좋게 돈을 벌 수 있고, 좋은 결정으로도 불운하게 손실을 볼 수 있으니 한 두번의 경험을 절대화하지 말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자신만의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수립하라는 얘기다. 그러니 몇 일, 몇 개월간의 투자에서 얼마간의 이익이나 손실을 얻었다고 일희일비하지 말 일이다. 약자 최후의 무기가 시간 뿐이라면, 그 효용을 극대화하는 것이 곧 최선의 전략이 아니겠는가. 포모와 공포에 몰려 시간이라는 무기를 내던지고 자발적으로 무장해제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장기투자를 보호하고 촉진하는 정부의 정책 필요성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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