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배우 고(故) 이순재 씨의 연기대상 수상 소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평생을 연기에 진심을 쏟은 그의 솔직한 말들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연기 인생 70년 만인 아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대상을 받는 대선배의 수상에 후배 배우들은 모두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이 모습은 그가 진정으로 존경받는 어른이었음을 증명했다. ‘꼰대’와 ‘틀딱’으로 나이 먹음이 조롱받는 시대에 대중과 후배들의 진심 어린 사랑을 받으며 생을 마감한 그에게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품은 권위의 힘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 장면이 더욱 뭉클했던 건 그에게서 느껴졌던 ‘권위’의 힘을 이제 우리 사회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좀 과하게는 실종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듯싶다. 우리의 현주소다. 애석하게도 가장 권위가 서야 할 사회의 지도층이라 불리는 엘리트들에게서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 가운데서도 사법부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극한의 대치 국면에서 타협이 사라지고 무조건 법적 판단에 결론을 맡기겠다는 ‘정치의 사법화’ 시대다. 이 파고 속에서 사법부는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특히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 사태를 거치는 가운데 사법부가 보인 모습은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스스로 권위를 저버린 모습과 다름 없었다.

지귀연 판사의 윤 전 대통령 구속 취소 결정과 대선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이뤄진 대법원의 선거법 위반 전원합의체 판결은 갈등의 종결이 아닌 또 다른 갈등의 화약고가 됐다. 결론에 대한 각각의 논리는 충분히 제시됐다지만, 두 사건 모두 이례적이었음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이는 곧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씨앗이 됐다. 법을 통해 사회의 갈등을 최종적으로 종결짓는 사법부의 위기는 갈등 조정 시스템의 붕괴와 다름 없기에 현 상황이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여당을 중심으로 법 왜곡죄 신설, 재판소원제 도입, 대법관 증원으로 요약되는 사법개혁 3법이 강행되고 있다. 사법부는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국민들에게 직접 피해가 갈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지난 24일에는 전국 법원장들이 모여 회의를 열기까지 했다. 특히 법 왜곡죄에 대한 이들의 우려는 상식적으로 보아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이 나올 때마다 법 왜곡으로 몰고 갔을 때 법안은 자칫 갈등 제조기로 전락할 수 있다는 그들의 호소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이런 목소리는 좀처럼 힘을 얻지 못한다. 아마도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가 바닥까지 추락해서일 것이다. 판사의 무게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요즘 부쩍 자주 듣는다. 그들의 판단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기준점이 된다는 소명 의식을 이제 느끼기 힘들다는 지적을 자주 접한다. 결국 또 하나의 전문직이 되어버린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고(故) 이순재 선생을 떠올린다. 그가 대중으로부터 깊은 존경을 얻었던 데는 일에 대한 그의 진심 어린 ‘직업정신’ 때문이었다. 평생을 연기에 진심을 다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무거운 권위의 힘으로 모두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이 직업정신을 사법부에 기대해 본다. 사법부의 위기 극복의 출발점은 지식과 논리가 아닌 이 진심에 있다.

정순식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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