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공기가 바뀌었다. 주말 산책길에 불어온 바람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마침내 가을이다. 또 한 번의 극한 여름을 우리 모두 견뎌냈다. 40도가 넘는 더위, 한 달 넘게 이어진 열대야. 올해도 숱한 폭염의 신기록들이 쓰였다.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역설적 표현은 여전히 유효했다. 지난주 기상청이 발표한 ‘2026년 여름철(6~8월) 기후 특성과 원인’ 분석 데이터는 이를 적나라하게 가리키고 있다.

올여름 여러 폭염 기록은 또다시 포디움에 올랐다. 역대 전국 여름 평균 기온의 최고치 금·은·동 메달을 최근 3년이 싹쓸이했다. 올여름 전국 평균기온은 25.4도로 평년보다 1.7도 높았다. 2025년(25.7도)과 2024년(25.6도)에 이어 역대 세 번째로 높았다. 동메달이다. 올여름 전국 열대야 일수는 18.2일로 평년(6.5일)의 약 2.8배에 달했다.

역대 두 번째, 이번엔 은메달이다. 광주·남원·완도·구미 등 11개 지점에서는 관측 이래 가장 많은 열대야가 나타났다고 한다. 국지성 호우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달 17일 거제에서는 1시간에 124.5㎜의 비가 쏟아졌다. 기상청은 이를 200년에 한 번 나올 법한 폭우라 했다. 이날 거제의 일강수량은 654.3㎜로 관측 이래 세 번째, 또 동메달이다.

비단 우리만의 현실이 아니다. 에어컨 걱정 없이 여름을 나던 유럽은 겪어보지 못했던 폭염에 속수무책이었다. 네팔은 점차 옅어지는 빙하의 붕괴가 가져온 대홍수의 비극에 오늘도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런 극한 기후의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 ‘기후변화’를 꼽는다. 하지만 참으로 식상한 말이 됐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일까. 오히려 경계감이 덜하다. 삶의 터전이 사라질 수 있다던 경각심은 이제 정치색에까지 우선순위를 내줬다. 정권의 교체를 거듭하며 재생에너지 정책은 좌파 정권의 산물로 낙인이 찍혔다. 정책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정쟁만 남았다.

매일 아침 출근길, 회사 사무실에 가까워질 때면 시간을 보게 된다. 지각을 염려해서가 아니다. 사옥 옥상에 매달린 ‘기후위기시계’가 눈에 들어와서다. 이 시계는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 상승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디지털로 표시하는 시계다. 최근 이 시계의 앞자리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3년여가 남았던 시간이 최근 2년 대로 줄었다.

5년 전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에는 뒤로 흐르기까지 했던 시간이다. 당시 전 세계 공장과 인간의 탄소배출 활동이 줄어들면서 7년 295일까지 1년이나 데드라인이 늦춰졌었다. 하지만 그 뒤 5년이 흘러간 시간만큼 줄어 이제는 ‘끝’을 향하고 있다.

문제는 실종된 절박함이다. 이 시계를 접하며 호기심을 표했던 한 취재원은 ‘지구종말시계’라 했다. 살벌한 표현이지만, 3년의 벽이 붕괴된 지금 그와 나 모두 그날을 종말로 여기고 있지는 않다. ‘설마’의 마음이 우리를 지배한다.

돌변한 기후는 예고 없이 지금도 누군가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고 있다. 그 빈도도, 강도도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익숙한 공포감은 ‘나는 아니겠지’라는 안일함에 밀려나 있다.

선선한 바람에 극한의 여름 기억도 벌써 지워져 간다. ‘기후위기시계’가 ‘0’을 가리키는 그날. 우리는 어떤 일상을 맞이하고 있을까. 지금대로라면 극적인 반전의 기미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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