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탈취 입증장벽 허문 ‘한국형 증거개시’…범부처 첫 도입
전문가 현장조사·당사자 신문·자료보전 명령 ‘3종 세트’ 법제화
미·일·독엔 있는데 한국엔 없었다…기술탈취 소송 판도 바뀐다
중기부 행정조사 자료도 법정 제출 가능…‘솜방망이 처벌’ 비판 정조준
[헤럴드경제=홍석희 기자] 기술탈취 분쟁에서 피해 중소기업이 “증거를 못 내서 지는 싸움”을 반복해온 법 체계가 바뀌었다. 그간 기술탈취 문제는 적발을 하더라도 기술 탈취에 대한 ‘입증 책임’을 피해자측이 지게 되는 구조라, 매번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중소벤처기업부는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K-디스커버리)’ 도입을 핵심으로 하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기술탈취 피해 중소기업이 소송 과정에서 증거 접근 자체가 막혀 패소하는 악순환을 끊겠다는 취지다.
이번 개정안은 정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중소기업 기술탈취 근절 방안’의 후속 입법으로, 현장에서 지속 제기돼 온 “기술은 빼앗겼는데, 증거는 가해자가 쥐고 있다”는 구조적 모순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기술탈취 소송에서 피해 중소기업은 고질적인 정보 비대칭에 시달려 왔다. 실제로 지식재산처와 벤처기업협회 조사에 따르면 기술탈취 피해 기업의 최대 애로사항은 △증거수집 등 입증 곤란(73%) △소송기간 장기화(60.8%) △과도한 소송비용 부담(59.5%) 순으로 나타났다.
미국·독일·일본 등 주요 기술 선진국들이 이미 증거개시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은 관련 제도가 부재해 ‘기술탈취는 잡아도 처벌은 약하다’는 비판이 반복됐다. 특히 대기업·원청이 핵심 자료를 보유한 상황에서 피해 기업이 이를 입증하라는 구조 자체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개정 상생협력법의 핵심은 기술탈취 소송에서 법원이 증거 접근을 직접 열어주는 장치를 제도화 했다는 점이다. 먼저, 법원이 지정한 전문가가 당사자의 사무실·공장 등을 직접 방문해 자료 열람과 현장 조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해당 조사 결과는 법원이 증거로 인정할 수 있어, 기술 구조나 공정 유사성 등 전문 판단이 필요한 쟁점에서 실질적 효력을 갖는다는 것이 중기부의 설명이다.
또 법정 밖에서 녹음·영상녹화 방식의 당사자 신문을 허용해, 진술 자체를 증거로 제출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간 법정 공방에서 사실 확인이 지연되던 구조를 보완하는 장치다. 여기에 더해 법원이 기술자료 훼손·멸실을 막기 위해 자료보전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했다. 증거 인멸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미다.
이번 개정안에는 법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중소벤처기업부가 수행한 기술탈취 관련 행정조사 자료 제출을 명령할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됐다. 민사소송과 행정조사의 단절로 인해 실체 규명이 지연되던 문제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수·위탁 거래 체결 이전 단계에서 발생한 기술자료 유용 행위까지 법 적용 대상에 포함시켜, 보호 범위도 한층 넓혔다.
한성숙 중기부 장관은 “한국형 증거개시 제도 도입은 기술탈취 피해 중소기업이 증거 접근권을 확보하는 제도적 전환점”이라며 “중소기업의 땀과 노력으로 개발한 기술이 정당하게 보호받는 시장 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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