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석 경희대 교수 ‘최인훈의 아시아’
양도 사자도 아닌 제3의 길 모색해야
“민주주의 가치 중요…K-문학 관심 높아”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우리 혁명은 프랑스 혁명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 혁명은 다만 한 가지 형태의 착취를 다른 형태의 착취로 바꾼 데 지나지 않지만, 이에 비해서 우리들은 인간의 의한 인간의 착취에 바탕을 둔 사회를 인간의 연대성에 바탕을 둔 사회로 바꾸어 놓고 있는 중이다.”(최인훈, ‘화두’ 2)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한 번쯤은 봤을 작가 최인훈. 1934년 태어난 그는 대표작 ‘광장’을 비롯해 ‘회색인’, ‘화두’, ‘주석의 소리’ 등 일련의 작품에서 한국의 현실과 한국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장문석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신간 ‘최인훈의 아시아’에서 최인훈이 제기한 질문을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고, 그가 모색한 대안과 유산을 촘촘히 살폈다. 1960년 ‘광장’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그가 제기했던 이념과 냉전, 선진국과 후진국, 민주주의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현재와 겹쳐 읽힌다.
지난해 ‘경희대 시국선언문’으로 주목 받기도 했던 장 교수를 15일 경희대 교정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최인훈을 주제로 책을 쓴 이유는.
▶최인훈은 20세기 한국인의 삶과 생각의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한국 너머로 나아갈 수 있는가 고민을 많이 했던 작가다. ‘광장’이 나온 지 6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가면서 그의 문학을 읽고 한국인이 누구인가, 한국인이자 세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지금 국문과에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은데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 작가였다.
-최인훈의 작품에는 냉전, 후진성, 독재 등이 배경으로 깔려 있는데, 현재도 신냉전, 극우의 대두와 이념 갈등 심화, 민주주의 위협, 독재 정권 등이 존재한다. 당시와 지금의 현실이 겹치는 부분과 다른 점은.
▶애초 책을 쓸 때는 냉전 체제 아래서 자유롭게 이야기하지 못하고 작가가 더 정의로운 삶, 민주적인 삶을 고민한다는 내용이 정말 옛날얘기라고 생각하면서 원고를 썼었다. 그런데 최근 계엄이 발생하면서 전혀 다른 상황에서 출간하게 됐다. 포고령에 들어가네 마네 했던 항목 중 야간 통행금지도 있었는데, 이는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럴’이 다룬 내용이다. 역사 속의 풍경들이 지금도 살아오는 것을 보면서 동시성을 갖는 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억압적 체제 안에서도 평범한 시민들이 자유롭고 우애 있게 살아 가는 공동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내용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광장’의 중립국은 도피가 아닌 선택으로 풀이된다. 중립이 시사하는 의미는.
▶‘광장’을 썼을 때는 냉전 시기, 남북이 적대적으로 대립하던 시기다. 극단적 이념 둘 다에 거리를 두면서 다른 영역을 선택한 것이다. 지금은 또 다른 적대의 선들이 많이 그어져 있다. 최인훈은 양극단의 싸움을 넘어서서 어떻게 하면 좀 더 대화할 수 있는 완충 지역을 만들고, 대립을 완화할 수 있는지 모색했다.
-‘회색인’은 “스스로 선택하고 동시에 소명된 한국인”, 곧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에 주목했다고 평가했다. 최인훈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이란 무엇이었을까.
▶최인훈에게 한국이란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지 못했던 나라였던 것 같다. 우리 역사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언어, 명칭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다른 이름을 빌려 와서 설명해야 한 시기가 꽤 길었다. 나의 이름으로 나의 정체성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동시에 배타적 태도가 아니라 다른 이름, 나라와 소통하는 방법, 더 나은 세계 질서를 꿈꿨다.
![장문석 경희대 국문과 교수의 신간 ‘최인훈의 아시아’ 표지. [틈새의시간]](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18/news-p.v1.20250417.02d61f5c7ab6436db278c6aee6ffa6dd_P1.jpg)
-이 책은 한국과 세계 사이의 ‘아시아’라는 보조선에 주목했다. 아시아의 원리가 갖는 의미는.
▶19~20세기 역사는 유럽 제국주의 중심으로 진행됐고 아시아는 식민지였던 나라들이다. 선진국으로 세계를 살아갔던 나라들의 삶의 원리가 아니라 식민지의 억압 받던 사람들, 고통받은 사람들의 원리, 아시아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어떤 세계를 상상해야 할지 탐색하고자 했다.
-한국은 최인훈이 꿈꾼 “국민사인 것이 바로 인간사”인 나라에 어느 정도 도달한 것일까.
▶많이 도달했을 것이다. 작년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한 나라가 됐고, 최근 계엄이 떨어지긴 했지만 민주주의도 성취를 잘했고, 경제도 굉장히 개발했다. 냉전 시기 한국은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이항 대립 앞에서 고민하면서 경제 개발에 매진했는데, 최인훈은 오히려 이항 대립을 넘어서는 질문을 고민했던 작가였다. 최인훈은 후진국을 ‘양’, 선진국을 ‘사자’로 표현하면서, 사자와 양이 어울려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의 결론은 양도 아니면서 사자도 아닌 어떤 단계, 적절한 균형에 머물면서 다른 나라와 공존할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한국은 후진국에서 벗어나 이제 선진국일까 하는 과정이 빨리 지나가서 스스로도 변화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오히려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이 한 주체로서 연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최인훈은 기존에 고독한 남성 지식인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됐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남성 지식인과 젠더, 계층, 직업, 고향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 최소한의 공동체를 만들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만들면서 그 안에서 서로 돌봐 주고 작은 일상 속 평화를 만들어가는 게 민주주의다, 여러 사람이 같이 머리를 맞대 문제를 해결하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회 안에서 공존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번 책에는 최인훈의 과거 사진과 이야기 등 새로운 내용도 많이 담겨 있는데 어떻게 발견했는지.
▶최인훈 선생이 병상에 계실 때 아주 짧게 뵌 적 외에는 뵙지 못했다. 이후 선생의 아들인 최윤구 님과 연락이 닿았는데 선생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책을 읽으셨는지 여쭤보면 친절하게 가르쳐주셨다. 최윤구 님이 작가의 군 시절 사진을 제공해 주셔서 책 앞에 청년 시절 최인훈의 모습을 실을 수 있었다. 또한 유튜브 채널 최인훈 연구소를 통해 최인훈의 고등학교 글과 ‘광장’을 출판한 정향사의 편집자 강민 님 인터뷰를 공유해주셨다. 출판사 틈새의시간은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제안과 조언을 해 줬다. 특히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쓸 때 연구자의 시각이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시민들의 시각에서 내용을 정리하고, 좀 더 풍성하고 부드러운 책이 되도록 조언해 주셨다.
-교과서에 실린 ‘광장’ 외에 최인훈의 다른 작품을 추천한다면.
▶보통 ‘광장’과 ‘회색인’을 제일 많이 이야기하는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유년 시절의 식민지 경험을 그린 ‘두만강’, 인도네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가상 역사소설 ‘태풍’은 지금까지 독자들의 관심을 많이 못 받았지만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15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문과대학 앞에 선 장문석 경희대 국문과 교수. 배경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해 1989년 완성된 벽화 ‘청년’으로,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임세준 기자]](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4/18/news-p.v1.20250415.c5e2a21033fd4442bfff39f45b703fc4_P1.jpg)
-지난해 대표 집필한 ‘경희대 시국선언문’이 주목을 받았었다. 대통령 파면에 대한 소회와 대학가 분위기가 궁금하다.
▶음…(고민). 탄핵 전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대학 안에서도 생각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이 경험을 받아들이면서 좋은 토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민주주의라는 가치, 생각이 다르더라도 존중하는 태도 같은 원칙이 중요하다. 최인훈 선생이 2018년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탄핵이 있었는데 당시 “우리 현대사의 최고 명문장은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주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사회의 최소한의 공유 지점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말씀하셨는데 최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비문학이 더 인기가 많은 시대지만 문학이 가진 힘은 무엇인가.
▶비문학도 지금 무척 소중한 성과이지만, 문학은 특정한 양식을 갖추어 쓰인 글이기에 문학을 읽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경험과 즐거움이 있다. 조금의 연습이 필요하지만 문학을 읽는 과정에서 논리적인 즐거움, 감성적인 울림, 그리고 한국어로 제시되는 다양한 생각의 형상을 만날 수도 있다.
-책에 문학을 통한 아시아, 세계와의 교류가 언급돼 있고,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있었다. 한국문학은 어느 정도에 위상에 있는지.
▶실제로 노벨문학상을 받고 난 후 외국에 가면 번역된 한강의 책을 봤다는 얘기를 굉장히 많이 들었다. 한국문학이 예전과 다르게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건 반가운 일이다. 실제로 수업하는 현장에서나 외국인과 얘기했을 때도 한국문학 작품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져 있고. 예전보다 더 많이 알려지고 많이 읽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예전처럼 ‘한국문학이 보편성을 가졌다, 앞으로 한국문학의 시대가 될 것이다’가 중요하기보다는 어떤 한국문학이 읽히고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는지를 세부적으로 잘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왜 지금 많은 사람이 한국문학을 읽고 있고, 다양한 국적을 가진 독자들과 어떤 대화의 장을 열어갈 수 있을까를 좀 더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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