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무기가 되는 그림
152. 베르트 모리조
최초의, 그리고 진정한
여성 인상주의 화가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엄마가 된 언니를 그리다

“언니를 그리고 싶어.”
베르트 모리조가 친언니 에드마의 손을 잡고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동생아. 너도 알겠지만, 난 모델을 하기엔 생기를 잃었어.”
“아니야. 언니. 이렇게만 있어줘도 충분해. 지금 모습을 담을 테니까.”
모리조는 당황하는 에드마와 거리를 벌렸습니다. “지금 내 모습을? 제발 그러지 마.” 에드마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래도 모리조가 못 들은 척 이젤을 펴는 걸 막아설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에드마는 요람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갓난쟁이 딸, 블랑슈를 겨우 재운 상태였지요. 까닥하면 아기 천사가 다시 눈을 뜰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언니, 쉿. 아이가 깨면 안 되니까 가만히!’
모리조는 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에 대고 있었습니다. 모리조는 당장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얄밉게도 붓질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에드마 또한 어쩔 수 없었지요. 한숨을 길게 내쉰 뒤, 가만히 멈춘 채 아이만 바라볼 수밖에요.
세로줄 옷을 입은 어머니, 에드마가 흰 베일에 싸인 채 잠든 딸 블랑슈를 바라봅니다.
에드마의 눈빛에선 여러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딸을 향한 애정과 관심, 아울러 생에 대한 우수(憂愁)와 무상함도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역시나 피곤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질끈 묶은 머리카락과 삐져나온 잔털, 왼손으로 턱을 받친 자세 등 고단함은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볼에는 부스럼마저 올라온 듯합니다.

1873년의 어느 날, 모리조의 <요람>은 이 과정에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모리조도 몰랐을 겁니다. 훗날, 이 작품이 인상파가 낳은 가장 성스러운 그림 중 하나로 꼽히게 되리라곤.
모리조는 어떠한 삶의 궤적을 품은 채 <요람>을 그렸기에 이런 평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이보다 앞서, 당시 꽉 막힌 사회 분위기에서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붓을 쥘 수 있었을지요. 까칠한 남자투성이의 인상파에는 어쩌다 속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번에는 최초의 여성 인상주의 화가, 모리조의 남다른 삶과 예술관을 살펴봅니다.
고요한 소란을 몰고다닌 여정을 짚으며, ‘삶의 무기’로 참고할 만한 게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봅니다.
프라고나르의 ‘핏줄’

먼저 1841년, 모리조가 태어난 그해로 시간을 거슬러 갑니다. 그녀의 삶은 출발선부터 흥미롭기 때문입니다.
모리조는 지방정부 고위 행정관인 아버지, 부유한 집안 배경을 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덕에 상류층 아이로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커가면서 본인 혈통에 대한 더 흥미로운 이야기도 듣습니다.
자신이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라는 것. 섬세하고도 화려한 화풍, 로코코 양식의 대가였던 그 화가 말입니다. 그는 요즘 시대에도 걸작 <그네>를 그린 예술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딸의 타고난 재능을 볼 때, 예쁜 응접실에서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수준에서 멈추지 않을 거예요. 딸은 화가가 될 겁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계시죠? (남자 화가들 중심의 예술계에선)완전히 혁명적인 일일 거예요.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핏줄은 속이지 못하는 걸까요.
모리조도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개인 교사였던 화가 조제프 기샤르가 그녀 부모에게 윗말처럼 경고할 만큼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나올 무렵, 10대 중반을 갓 넘긴 모리조는 이미 화가 꿈을 진지하게 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진작부터 교양 이상의 발전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조상에게 이어받은 소질, 부모의 재력이 있어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는 무엇보다도 ‘여자 따위가 예술을 한다’는 식의 말과 분위기를 무시할 수 있는 배짱도 있었기에 가능한 행보였습니다.

모리조는 당대 최고 풍경화가였던 카미유 코로에게도 지도를 받았습니다. 훗날 인상주의의 발판을 들였다고 평가받는 이 거장 덕에 외광(外光) 회화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모리조는 곧 파도도 일으킵니다.
1864년, 고작 스물셋 나이로 파리 살롱전(展)에 입상한 겁니다. 원로급 유명 화가에게조차 고배를 건넨다는 깐깐한 심사위원단을 홀린 겁니다.

그리고 4년 뒤.
모리조는 한 남성 화가와 운명적 만남도 갖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그는 고루한 아카데미 화풍에서 벗어나고자 한, 현실을 나돌며 당장의 순간을 담고 싶어한 젊은 화가들이 대장처럼 받들던 자였습니다.
모리조는 그런 마네 덕에 그 시절 혁명적 화풍, 가까운 미래에 인상주의로 불리게 될 기법에 발 담글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모리조에게 마네는 큰 존재였습니다. 예술세계에서 ‘터닝 포인트’를 안겼으니까요.
모리조는 존재 자체가 혁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혁명적 기법에도 쉽게 동화될 수 있었을 겁니다.

마네가 그린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조> 속 눈빛을 보세요.
검은 모자와 검은 옷, 밤색 머리카락과 뒤엉킨 검은색 모자 끈과 리본 레이스….
이 가운데서도 유독 안광이 압도적 존재감을 보입니다. 무엇이든 그게 옳다고 판단하는 순간, 결코 좌고우면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휘갈긴 듯 그려진 제비꽃 장식은 그녀의 끝내 쓰러지지 않는 긍지를 뜻하는 듯합니다.
모리조는 그렇게 금세 전위 예술가의 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마치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듯.
풍경화, 마음껏 그리고 싶었지만…


인상주의라고 하면 보통은 넘실대는 빛을 담은 풍경화, 활기찬 바깥 분위기를 품은 풍속화를 떠올리기 쉽지요.
시시각각 바뀌는 햇빛을 담은 클로드 모네의 <건초 더미> 연작, 따사로운 햇볕과 함께하는 인파를 그린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등이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모리조 또한 그 분야에선 밀리지 않는 감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리조는 진작부터 <로리앙 항구> 같은 풍경화를 그릴 수 있는 화가였습니다.
이는 자유로운 붓질과 과감한 색 배치, 은은한 분위기 등 인상주의 특유의 실험 기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모리조는 애초 야외 그림의 대가인 코로에게 풍경화를 배운 화가였습니다. 살롱전 입선 당시에도 풍경화로 호평을 받은 예술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사실은 자유롭게 풍경화를 그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는데요.
알고 보면요. 지금껏 그녀가 그린 풍경화는 갖은 외풍 속에서 힘겹게 건져올린 것이었습니다. 왜일까요. 당시 사회 탓이었습니다.
그 시절 프랑스 등 유럽 국가 대부분의 여성은 홀로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공공장소를 갈 때도 아버지 또는 남편, 연장자인 여성이나 자식이라도 데리고 가야 했습니다.
이는 모네처럼 해가 질 때까지 밀밭에 죽치고 있는 일, 르누아르처럼 종일 무도회장을 관찰하는 일 모두 그녀 입장에선 쉽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그뿐인가요.
마네처럼 술집에서 매번 밤을 새울 수도, 에드가 드가처럼 발레 공연장을 매일 밤 드나들 수도 없었습니다.
카페, 광장, 골목길 등 인상주의자들의 그림 소재가 된 많은 야외 현장을 편하게 누비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이런 만큼 모리조도 고민이 깊었을 테지요.
자유롭게 오가는 배. 반면, 양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 숙인 여성. 그녀는 딱 <로리앙 항구> 속 여인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이런 결론을 끄집어냈을지도 모릅니다. 인상주의자로서 ‘밖’을 마음껏 그릴 수 없다면, ‘안’을 마음대로 그려보자. 새로운 갈래여서 잔풀이 가득하다면, 도끼가 돼 이를 터보자.
즉 (당시 사회상으로는)무너지지 않는 벽 앞에서 주저앉지 말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중에서도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또 한 번 파도를 일으켜보자고요.
인상파의 가장 성스러운 그림

다시 모리조의 <요람>을 봅니다.
풍경화 작업에 임할 때의 열정을 실내화(室內畵) 그릴 때도 품기 시작한 모리조. 그녀의 이런 행보는 단순한 오기가 아니었습니다.
모리조에게는 섬세함이 있었습니다. 다른 동료 화가들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쉬이 포착하기 힘든 부분도 잡아낼 수 있었습니다.

가령 당시 길 가는 아무나 화가를 붙잡고 어머니와 아기 그림을 주문하면 결과물이 어떨까요.
표현법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고 해도, 십중팔구는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 산치오의 <성모자상> 같은 ‘모두가 행복한’ 분위기인 작품을 내놓을 테지요.
그러나 <요람>은 다릅니다.
어머니의 모습을 더 ‘사실적으로’ 보입니다. 아기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시선을 뗄 수 없지만, 이 작은 축복이 잠든 덕에 겨우 한숨 돌리는 모습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어머니의 샘솟는 모성애 뒤에 고여드는 애달픈 감정까지 잡아낸 겁니다.
소박한 묘사, 풍부한 색채, 따뜻한 공기….
이 그림에는 인상주의의 특징까지 오롯이 품고 있지요. 이런 점에서 내용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세밀하게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할 게 없는 듯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하루 속 어머니를 세밀하게, 아울러 특유의 은은함과 함께 담은 그림. 이 작품이 인상파의 가장 성스러운 결과물로 불리는 이유였습니다.

하나 더.
<요람> 속 모델이 된 모리조의 친언니, 에드마가 품은 사연을 알면 그림은 더 애틋해집니다.
과거 에드마는 모리조와 함께 그림을 배웠습니다. 감각도 탁월했습니다. 가정교사 기샤르가 이들 부모를 향해 한 경고(딸은 응접실 밖 ‘진짜’ 화가가 될 것이라는)는 사실 모리조와 에드마 모두에게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드마는 모리조와 달리 꿈을 접었습니다. 해군 장교와 결혼한 후 이사를 하고, 얼마 뒤 아기까지 갖게 돼 더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모리조는 그런 언니의 상황을 안타까워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나는(…) 우리가 함께 있던 화실의 공기를 잊지 못한단다.
이런 편지글을 읽을 때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지요.
모리조는 그런 아쉬움을, 안타까움을 화폭에 함께 녹여냈습니다.

1874년, 모리조는 제1회 인상파전에 <요람> 등 아홉 점을 들고 데뷔합니다.
이때 나이가 서른셋이었습니다. 그날, 모리조는 최초이자 당시로는 유일한 여성 인상주의 화가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이 일은 인상파 모임에 꽤 지분이 있던 드가가 의외로(?) 밀어붙였기에 가능했던 건 아실지요.
까칠한 성격, 여성에 대한 깊은 불신을 보였던 드가는 모리조의 그림 앞에서는 눈 녹듯 마음을 풀었습니다.
“한 명의 리얼리스트도 배제하지 않는 리얼리스트 전시회를 열고 싶습니다.” 심지어 드가는 모리조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까지 쓸 정도였습니다.

행사는 모네의 논란작 <인상, 해돋이> 등으로 (그다지 좋지 않게)난리가 났지만, 그 틈에서도 모리조의 <요람> 등 작품은 비교적 호평을 받았습니다.
모든 핸디캡을 딛고서, 오직 실력과 감각만으로 구세대와 신세대 모두에게 인정을 받은 셈입니다.
‘그녀’라서 볼 수 있던 장면

모리조의 매력적인 실내화 두 점을 더 소개합니다.
먼저 1880년 제5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화장하고 있는 여자(화장실에 있는 여자)>입니다. 흰옷을 입은 여자가 거울 앞에 서있습니다. 머리를 만지고, 화장도 고치며 매무새를 살펴보는 듯합니다.
그녀는 이곳에서만큼은 긴장을 풉니다.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들어올린 팔, 아무렇게나 흘러내리는 옷소매 등으로 이를 짐작할 수 있지요. 모리조는 실내로 새어 들어온 빛의 변화, 그리고 화폭 속 여성의 꾸밈없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만 집중했습니다.
더 예쁘게 그려야 한다는 강박, 혹시 이런 모습은 아닐까 하는 식의 상상 따위야 모리조이기에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또한 역사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인상주의풍으로 담은, 타자의 막연한 환상에 이염되지 않은, 여성의 온전한 일상 한 조각이요.

1886년께 내보인 <부엌이 있는 식당에서> 또한 흥미롭습니다.
여자가 흰 앞치마를 두른 채 식당에서 모습을 보입니다. 당당한 자태로 허리를 편 그녀에겐 이곳이 제 손바닥 위라는 자부심이 묻어납니다.
왼편의 식기, 오른편의 과일, 발밑 강아지. 나아가 무언가를 쓰는 듯한 자세를 통해 가계까지 통제하고 있다는 식의 의젓함도 느낄 수 있지요.
이 와중에 창문 유리를 타고 들어온 빛은 벽과 바닥, 여인과 귀여운 털 뭉치까지 흠뻑 적시고 있습니다.
이 또한 별것이 아닌 듯하면서도 고귀한 실내 일상이었습니다.
모리조가 아니면, 주변의 어떤 인상주의자도 쉬이 포착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리조는 그렇게 또 한 번 새로운 길을 개척했습니다.
개척에 그치지 않고 정복해 버렸습니다. 이제 그녀는 단순히 여성 화가여서 관심받지 않았습니다. 실력깨나 있는 풍경화가여서 이목을 끌지도 않았습니다.
노련함과 독창성을 함께 갖춘, 어디서도 대체할 수 없는 예술가여서 주변의 시선을 끌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모네, 세잔처럼…

끝으로 1882년, 어느덧 마흔이 넘은 모리조가 그린 풍경화 <니스의 항구>를 봅니다.
모리조가 쉰네 살에 생을 마감하는 만큼, 이는 그녀의 말년작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배와 바다, 산과 빨간 지붕의 건물 모두 내리쬐는 빛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특히나 은색과 회색, 옅은 푸른색이 섞인 바다는 금방 물방울을 튀길 듯 생기가 가득합니다.
붓질은 과감해졌고, 묘사는 대담해졌습니다.
이 그림에선 주목할 만한 부분이 또 있는데요.
건물을 굳이 비딱하게, 배는 마치 물에 녹아들고 있는 듯 어그러지게, 일부 물결을 대놓고 고불고불하게 그렸다는 점입니다.


모리조의 옛 여정을 볼 때, 실력 부족이 아닌 ‘일부러’ 이렇게 표현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니스의 항구>는 모네의 <수련>,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도 떠올리게 하지요.
그녀 또한 인상주의가 이끈 색채의 해방 다음 단계, 형태의 해방이 곧 이뤄지리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한편, 모리조 또한 친언니 에드마처럼 결혼을 합니다.
식은 인상주의 첫 전시가 열린 1874년에 올렸습니다.
모리조가 믿고 따른 마네, 그의 동생. 외젠 마네가 남편이었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이미 유부남이었던 마네가 모리조와 계속 함께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 결과(!)라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
모리조는 에드마와 달리 결혼 후에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첫 아이, 줄리를 낳고도 그랬습니다. 이는 개인의 강단, 아울러 남편 외젠의 지지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리조는 줄리를 낳은 해를 빼고선 모든 인상주의전에 그림을 출품했습니다.
상당수 동료가 포기하고, 이탈하고, 충돌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작품을 내보였습니다. 이 또한 그녀의 근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모리조는 1892년,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삶과 예술세계의 화룡점정(畫龍點睛)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인상주의 화가.
르 탕(Le temps)의 한 비평가는 모리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녀의 존재가 예술계의 ‘혁명’이지, 결코 ‘재앙’은 아니었다는 걸 재차 확인해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열정의 삶을 산 모리조는 1895년에 눈을 감았습니다. 사인은 폐렴 또는 장티푸스로 알려졌습니다. 향년 쉰네 살 나이였습니다.
모리조의 사망 증명서 속 직업은 ‘무직’으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녀의 직업은 예술가이자, 혁신가이자, 지칠 줄 모르는 투사였다는 것을요.
“그녀는 그림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삶 자체를 그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시인 폴 발레리가 모리조에게 바친 헌사였습니다.
참고자료
우리가 잊은 어떤 화가들, 마르틴 라카, 페리버튼
Berthe Morisot, Rey, Jean-Dominique, Patry, Sylvie, Editions Flammarion
기자의 말풍선

내 사랑아. 죽을 때까지 널 사랑해. 죽어서도 널 사랑할게. 제발 울지 마.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야. 네가 결혼할 때까지 살고 싶었어. 늘 그랬듯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살아. 네 짧은 인생 동안 너는 내게 단 한 번의 슬픔도 주지 않았어. (…)
모리조가 죽기 하루 전 딸에게 쓴 편지입니다.
너는 내게 단 한 번의 슬픔도 주지 않았다. 참 따뜻한 문장이에요.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