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연일 관세 부과 으름장
칩 가격 상승에 수요 위축 우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강도 ‘관세’ 칼날이 반도체를 향하면서 국내 산업계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모바일과 PC 등 IT 제품 판매 부진과 중국 메모리 업체의 공습으로 고전하는 가운데 미국발 관세라는 악재까지 더해지면서 올해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수익성 개선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3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 하원 공화당 의원들과의 회동에서 “조만간 외국산 컴퓨터 칩, 반도체,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 제조업체가) 25%, 50%, 심지어 100%의 세금을 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라며 “관세를 내지 않으려면 바로 이곳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외에서 반도체를 만들어 미국에 판매하는 기업들에게 관세를 피하려면 미국으로 들어오라고 으름장을 놓은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일(현지시간) 멕시코와 캐나다산 제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을 서명하기 전날에도 재차 반도체를 언급했다. 그는 “반도체에 관세를 부과할 것이다”며 “2월 18일쯤에는 석유와 가스에도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도체 관세 압박은 우리나라와 대만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 후보 시절부터 바이든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정책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관세 부과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으로 수입되는 반도체에) 매우 높은 관세를 부과하면 그들이 미국에 와서 반도체 공장을 지을 것”이라며 대규모 보조금을 주는 대신 관세로 반도체 기업들의 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아직 미국의 실제 관세부과 여부와 그 수준이 확정되지 않은 만큼 진행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입장이다.
반도체가 우리나라의 주력 수출 품목인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기어코 반도체에도 고강도 관세를 부과할 경우 적잖은 타격을 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우리나라의 대미(對美) 반도체 수출액은 103억달러(약 15조1480억원)를 기록해 전년보다 123% 급증했다. 특히 지난해 12월 1~25일에는 대미 반도체 수출액이 전월 대비 51.4%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AI) 서버 투자를 확대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고용량·고부가 메모리 반도체의 수출도 크게 늘었다는 분석이다.
AI 시대 각광받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비롯해 더블데이터레이트5(DDR5),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이 K-반도체 수출을 이끌고 있는 주력 제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산업연구원은 미국이 보편관세 부과 시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은 4.7%에서 8.3% 감소할 것으로 내다봐 부정적 영향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봤다. 김정훈 한국신용평가 수석애널리스트는 최근 SK하이닉스에 대한 신용등급 보고서에서 “미중 무역마찰 우려 등으로 전통 IT제품 수요 성장폭이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중국 메모리 업체의 공급능력 확대 추세, 트럼프 재집권에 따른 관세 부담 등 전년 대비 사업환경이 다소 저하될 것으로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수익성 개선 여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도체에 관세를 매기면 칩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수요 위축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칩 공급업체들이 관세 부담만큼 고객사에 비용을 전가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것이란 전망이다.
중국을 겨냥한 고관세 정책 역시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에겐 악재다. 중국 경기 둔화로 PC,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까지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송명섭 iM증권 연구원은 “전세계 PC, 스마트폰 생산의 절반 가량이 중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고관세 부과가 재현될 경우 대중국 반도체 수출 둔화는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내 첨단기술 분야 최고 싱크탱크인 정보기술혁신재단(ITIF)의 스티븐 에젤 부사장은 관세 정책이 오히려 자국에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젤 부사장은 “인도, 일본, 말레이시아 등에서 수입하는 반도체 제품에 더 낮은 관세를 부과한다면 대만 기업들은 공장을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이전할 것”이라며 실효성이 없다고 봤다. 그러면서 “중국 칩에 적용하는 관세가 대만에 적용하는 관세보다 낮다면 트럼프는 중국 반도체 제조업체를 돕게 될 것”이라며 “관세정책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면 모든 반도체 제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해야 하는데 이는 전 세계적 보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했다. 김현일 기자